※ 제30차 국제백세인컨소시엄(ICC) 특별대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백세인 연구의 핵심 성과와 미래 과제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했습니다.
1994년 미국 조지아에서 첫 국제 백세인 연구자 모임이 열린 이후 ICC는 세계 장수 연구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학술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특히 올해는 남미와 아프리카 연구진까지 합류하면서 명실상부한 세계 6대주 연구자들이 함께하는 국제학술대회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컸다.
대회 마지막 날, 한국 백세인 연구를 30년 이상 이끌어 온 박상철 전남대학교 석좌교수 와 미국 뉴잉글랜드 백세인 연구(New England Centenarian Study)를 창설한 톰 펄스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그리고 백세인의 임상적 노화 궤적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터 마틴 아이오와주립대학교 교수가 한자리에 모여 ‘백세인이 가르쳐 준 것들’을 주제로 특별 대담을 진행했다.
"왜 100세까지 사는가"에서 "어떻게 건강하게 100세를 사는가"로
박상철 교수올해 ICC가 30주년을 맞아 한국 고창에서 열린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제가 처음 한국 백세인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백세인은 매우 드문 인구학적 현상이었고 연구 대상 자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왜 어떤 사람은 100세까지 사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100세를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 건강수명의 연장이 인류의 새로운 과제가 된 것입니다.
톰 펄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1990년대 초반 우리는 장수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 연구의 핵심 목표가 되었습니다. 백세인은 더 이상 희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고령사회와 초고령사회가 도래한 지금, 백세인 연구는 미래 인류의 건강 전략을 설계하는 중요한 기초과학이 되었습니다
피터 마틴
저 역시 이번 ICC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그 지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수명(Lifespan) 중심의 연구가 건강수명(Healthspan) 중심의 연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 30년 동안 장수 연구가 이룬 가장 큰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수는 유전자일까, 환경일까
박상철저는 오랫동안 한국 백세인을 연구하면서 ‘장수지수(Longevity Index)’와 ‘초장수지수(Super Longevity Index)’라는 개념을 개발했습니다. 분석 결과를 보면 일반적으로 중산간 지역의 장수도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20~25년 단위로 추적해 보면 장수 지역도 크게 변합니다. 이는 유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지역 환경, 식생활, 공동체 문화, 의료 접근성, 복지정책 등 다양한 요소가 장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톰 펄스
반면 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백세인을 연구해 왔습니다. 뉴잉글랜드 백세인 연구 결과를 보면 백세인의 형제자매가 장수할 확률은 일반인보다 훨씬 높습니다. 특히 남성은 약 48%, 여성은 약 33% 수준의 유전적 영향력이 관찰됩니다. 그러나 유전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외상이나 감염 등 외부 사망 요인을 제외할 경우 유전은 수명 변이의 약 절반 정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장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입니다.
피터 마틴
저는 두 분의 연구를 연결하는 영역을 연구해 왔습니다. 유전자와 환경이 실제 인간의 몸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제 연구 주제입니다. 우리는 미국 건강·은퇴연구(HRS) 자료를 활용해 90세에서 100세까지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 궤적을 추적했습니다.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100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는 삶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유전자는 장수를 얼마나 설명하는가
박상철톰 교수께서는 이번 ICC에서 “백세인 유전학은 왜 어려운가”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톰 펄스
그 이유는 장수가 단일 유전자 질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수는 수천 개 유전자가 동시에 관여하는 다유전자 형질입니다. 백세인들은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의 질병 관련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는 보호 유전자에 있습니다. APOE2, FOXO3A, CETP, SIRT6 같은 유전자들은 면역조절, 지방대사, DNA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전자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95세보다 105세, 110세 이상의 초장수인에서 유전적 특징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박상철
한국 백세인 연구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윤사중 박사 연구팀은 한국 백세인의 전장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DNA 손상 복구 유전자인 BRCA1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ORAI1 유전자에서 나타난 특정 결실 변이는 만성 염증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노화의 핵심 기전으로 알려진 ‘염증노화(Inflammaging)’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톰 펄스
특히 ORAI1 연구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연구는 지금까지 유럽인 중심으로 구축된 유전체 표준이 반드시 보완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앞으로는 다양한 인종의 백세인 데이터를 통합한 범백세인 표준 유전체(Pangenome)가 필요합니다. 한국 연구진이 이 분야에서 중요한 선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90세에서 100세로 가는 마지막 10년
피터 마틴저희 연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이환 압축(Morbidity Compression)’입니다. 90세 시점에서 건강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100세가 되어서도 비교적 양호한 기능을 유지했습니다. 질병 자체보다 질병이 시작되는 시점을 늦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건강수명의 핵심은 질병 없는 삶이 아니라 질병이 늦게 시작되는 삶입니다.
톰 펄스
그것이 제가 강조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개념과 연결됩니다. 백세인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많은 백세인이 치매나 허약성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능을 유지하며 오래 살아갑니다. 질병을 견디는 능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100세를 사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
박상철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한국 백세인의 삶이 지난 25년 동안 크게 변했다는 점입니다. 2001년에는 대부분 자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2025년에는 절반 이상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많은 백세인이 직접 외출하고 사회활동을 하며 지역 공동체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피터 마틴
그 변화는 사회정책의 힘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박상철
그렇습니다. 기초연금, 장기요양보험, 맞춤형 돌봄 서비스 등이 백세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세인 스스로가 능동적인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걷기, 봉사활동, 종교활동, 문화활동이 일상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톰 펄스
사회적 연결은 생물학적 건강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외로움과 고립은 만성 염증을 증가시키고 노화를 촉진합니다. 반대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건강 장수 시대를 위한 실천 전략
박상철그렇다면 일반인들은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톰 펄스
유전자 연구는 결국 개인 맞춤형 예방의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생활습관입니다. 운동, 균형 잡힌 식사, 적정 체중 유지, 사회적 관계 형성이 중요합니다.
피터 마틴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90세도 늦지 않습니다. 건강 행동의 변화는 매우 늦은 나이에도 효과를 발휘합니다.
박상철
이번 ICC에서 발표된 홍콩 이공대학교의 연구는 그 사실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12주간의 생활습관 교육만으로도 내장지방과 대사 지표가 현저히 개선되었습니다. 건강 장수는 첨단 의료기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활습관과 공동체,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 관리가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맺음말
박상철30년 동안 백세인을 연구하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백세인은 특별한 초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전자와 환경, 생활습관과 사회적 관계, 의료와 복지가 오랜 세월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 낸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톰 펄스
장수에는 단 하나의 비밀이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노화의 속도는 늦출 수 있고, 건강수명은 늘릴 수 있습니다.
피터 마틴
우리가 연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품위 있게 100세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박상철
ICC 30주년의 슬로건은 ‘백세인, 건강 장수 시대의 선구자들(Centenarians as Pioneers of the Well-Aging Era)’입니다. 백세인들은 이미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제 과학은 그 발자취를 따라가며 인류 모두를 위한 건강 장수의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30년이 백세인을 발견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백세인이 가르쳐 준 지혜를 인류 전체의 삶 속에 실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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