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잇달아 시사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만 놓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수출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고, 성장률 전망도 개선되는 분위기다. AI 열풍에 힘입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한국 경제에 오랜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은 급격히 개선되고, 증시는 연일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과연 금리 인상을 감내할 만큼 튼튼해졌느냐는 점이다. 반도체가 잘 나간다고 해서 경제 전체가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이 특정 산업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경계해야 할 신호일 수 있다.
실제 한국 경제의 체감 온도는 반도체 공장 밖으로 나오면 크게 달라진다. 고금리와 고물가 부담은 여전히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가계에 남아 있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상승하고 있고 취약 차주들의 원리금 상환 부담도 커지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늘었다고 해서 골목상권의 한숨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최근 수년간 누적된 가계부채다.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 환경 속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이른바 '영끌' 차주들은 이미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금리 인하 기대를 바탕으로 추가 대출에 나선 가계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다시 상승할 경우 금융비용 부담은 예상보다 빠르게 커질 수 있다. 대기업과 수출기업은 버틸 수 있어도 가계와 자영업자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중심의 성장 구조가 갖는 취약성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수출 증가와 증시 상승, 기업 실적 개선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특정 산업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수와 서비스업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금의 반도체 호황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AI 투자 확대와 글로벌 데이터센터 증설이라는 외부 환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언제든 투자 속도가 조정될 수 있고,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변수도 남아 있다. 지금의 호황을 영구적인 성장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금리를 올려도 괜찮다는 자신감의 근거가 반도체라면, 그것은 동시에 한국 경제에 반도체 말고는 다른 무기가 없다는 고백일 수도 있다. 경제가 특정 산업 하나에 의존할수록 외부 충격에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가와 금융 안정을 위해 금리 정상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금리 정책은 성장률 숫자만 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경제 곳곳의 체력과 위험 요인을 함께 살펴야 한다. 특히 취약 계층과 한계기업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점검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반도체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는데 상당수 국민은 경기 회복을 체감하지 못한다. 증시는 축제 분위기지만 골목경제는 여전히 냉랭하다. 반도체의 성공이 곧 한국 경제 전체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정책은 가장 강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약한 곳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반도체 호황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그 성공만 믿고 금리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위험을 놓칠 수 있다.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 경제는 과연 그 충격을 견딜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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