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5㎞ 숲길이 서울을 바꿨다…'도심을 걷는 도시' 서울둘레길의 진화

  • 산허리 따라 숲·마을·하천 잇는 세계적 도심 트레킹

  • '걷는 복지' 실험장 확장 이어 관광 자산으로 발돋움

 
서울둘레길을 찾은 외국인 참가자들이 꽃길을 걸으며 도심 속 자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서울시
서울둘레길을 찾은 외국인 참가자들이 꽃길을 걸으며 도심 속 자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서울시]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는 젊은 부모들, 숲 사이로 펼쳐진 서울 도심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노부부까지. 서울 한복판 남산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정상 정복을 목표로 땀 흘려 오르던 산이 이제는 '천천히 걷고 쉬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 찾은 남산 하늘숲길. 숲 사이로 이어진 나무 데크에는 아이 손을 잡은 부모와 유모차를 끄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걸었다. 가파른 등산로 대신 완만한 경사와 쉼터가 이어졌고, 휠체어도 일부 구간 이동 가능했다. 남산타워가 가장 잘 보이는 전망 포인트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연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처럼 숲과 도시 전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서울시는 이를 단순한 산책길이 아니라 '걷는 도시' 전략의 핵심 인프라로 보고 있다. 서울둘레길은 총연장 156.5㎞ 규모다. 숲길 85㎞, 마을길 40㎞, 하천길 32㎞를 연결해 북한산·도봉산·수락산·불암산·용마산·관악산·우면산 등 서울 외곽 산줄기를 하나의 순환형 보행 네트워크로 묶었다. 서울을 한 바퀴 걸어서 연결하는 도시 숲길인 셈이다.
 
서울이 자동차 중심 도시 개발에서 사람 중심 도시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오세훈 시정 1기 때이다. 도심 속 자연을 '보는 공간'에서 '직접 누리는 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둘레길 구상이 시작됐다.
 
서울시는 당시 기존 등산로 중심인 산행 문화가 시민 접근성을 제한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가족, 노약자, 장애인 등이 함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생활형 녹색길 필요성이 제기됐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산허리를 따라 천천히 걷고 숲을 즐길 수 있는 길, 도시 가까이에서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생활형 트레킹' 개념이 등장한 배경이다.
 
서울둘레길 출발점에는 흥미로운 비화도 있다.
 
지난해 10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남산 하늘숲길을 찾은 자리에서 둘레길 구상 배경에 대해 "2007년쯤 제주 올레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해 가족들과 직접 걸어봤는데, 서울에도 산허리를 따라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당시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산 정상보다 산기슭을 편안하게 걷는 문화를 보고 영감을 받았고, 등산 인구 증가로 훼손되는 산림을 보호할 필요성도 컸다"며 "기존 산길을 데크길과 무장애 숲길로 연결하는 시도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서울 산은 한때 '등산객 과밀'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 이후 탐방객이 급증하면서 나무 뿌리가 드러나고 토양이 침식되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서울시는 훼손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나무 데크를 활용한 순환형 숲길 조성에 나섰다. 남산 하늘숲길 곳곳에 설치된 목재 구조물 역시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서울둘레길은 2014년 전체 8개 코스 연결이 완료되며 서울 대표 걷기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기존 코스는 평균 20㎞ 안팎으로 길어 일반 시민들에게는 부담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서울시는 2024년 '서울둘레길 2.0'을 내놓으며 코스를 대폭 손질했다. 평균 길이를 8㎞ 수준으로 줄이고 전체를 21개 코스로 세분화했다. 평균 완주 시간도 8시간에서 3시간 수준으로 단축했다. 퇴근 후 저녁 산책이나 주말 반나절 코스로도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것이다.
 
안전과 접근성도 강화됐다. 시작점과 종점에는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중국어·일본어 안내판을 설치했고, 둘레길과 연결되는 지하철역·버스정류장 안내를 보강했다. 주요 구간에는 지능형 CCTV와 QR코드 기반 비상신고 체계도 구축됐다.
 
둘레길은 이제 단순한 산책 공간을 넘어 '걷는 복지' 실험장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둘레길을 활용한 '서울둘레길 정원처방'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하기 시작했다. 산림치유지도사와 함께 숲길을 걸으며 호흡·명상·향기 치유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우울감과 스트레스 완화, 정서 회복 효과가 입증되면서 고립·은둔 청년부터 일반 시민까지 참여층이 확대되는 추세다.
 
서울시 시범사업에서는 고립·은둔 청년 대상 프로그램 참여 후 우울감이 최대 36%, 외로움은 최대 13%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 국제정원박람회 기간 조사에서도 숲과 정원 산책 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평균 1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서울둘레길의 경쟁력은 '도심 속 자연'에 있다. 세계 주요 도시에도 대형 공원과 녹지축은 존재하지만 서울처럼 대도시 외곽 산림축을 하나의 순환형 걷기 네트워크로 연결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뉴욕이 센트럴파크 중심의 거점형 녹지를, 런던이 템스강 보행축과 그린벨트 중심 구조를 갖고 있다면 서울은 산과 하천, 마을길을 촘촘히 엮은 입체적 걷기 도시 모델에 가깝다.
 
서울시는 이제 둘레길을 시민 휴식 공간을 넘어 관광 상품으로 발전시키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남산 하늘숲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산타워, 북한산 능선길, 우이천과 한강변 숲길은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서울 속 숨은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도시 경쟁력이 고층빌딩 숫자만으로 결정되던 시대는 지나고 있다. 얼마나 걷기 좋은 도시인지, 얼마나 시민의 마음까지 돌보는 공간을 갖췄는지가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156.5㎞ 서울둘레길은 지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2026_외국인걷기대회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