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제도가 올해로 스무 살을 맞이했다. 적립금은 2006년 말 7568억원에서 2026년 1분기 508조7341억원으로 600배 이상 불어나 양적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1조가 명시한 목적인 '근로자의 퇴직 후 생활 안정과 노후소득 보장'이 달성되었느냐는 질문에는 결코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제도는 두 가지 근본적 실패를 안고 있다.
첫째, 현재의 퇴직연금제도는 기업 도산 시 근로자의 퇴직급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퇴직연금 도입 사업장은 전체 대상 가운데 26.4%에 불과하며 상용 근로자의 53%만 가입해 있다. 사각지대는 영세사업장에 집중된다. 5인 미만 사업장의 도입률은 10.4%에 그치고, 30인 미만 사업장의 78%는 여전히 퇴직금제도에 머물러 있다. 이들은 퇴직급여를 장부에만 계상하고 사외에 적립하지 않아 회사가 재정 위기에 처하는 순간 퇴직금은 고스란히 체불 임금이 된다. 2024년 말 기준 임금체불액 2조원 중 40% 이상이 퇴직금 체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2%대로 낮은 수익률이다. 물가 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연금제도에 근로자를 의무적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수익률이 이처럼 낮은 이유는 적립금의 71%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DC형·IRP 기준 원리금 보장형의 최근 1년 수익률은 2.87%에 불과한 반면 실적 배당형은 22.79%로 7.9배에 달하며 최근 5년을 보아도 격차는 3~9배 수준이다. '연금 고수'로 불리는 40대 상위 가입자의 평균 수익률은 64.3%로 같은 연령대 평균인 6.0% 대비 10배를 웃돈다. 이 격차는 은퇴 시점에 돌이킬 수 없는 자산 차이로 굳어질 것이다.
이처럼 낮은 수익률에 가입자들이 묶인 것은 제도 설계 자체의 문제 때문이다. 가입자의 선택을 돕기 위해 도입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적립금 53조3318억원 중 85.4%가 '초저위험 등급'으로 운용되는데, 이 상품의 1년 수익률은 평균 2.57%로 은행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인 2.86%보다 낮다. 이런 구조가 고착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원리금 보장형을 포함하는 세계 유일의 구조로, 운용 결정을 내리지 않는 가입자를 '가장 안전한' 상품으로 자동 유도한다. 둘째, 계약형 구조에서 금융회사는 손실 리스크 없는 예금성 상품을 선호할 유인이 구조적으로 크다. 셋째, 가입자 투자 교육이 사실상 부재해 '원금이 줄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운용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와 정반대로 퇴직자의 노후 보장, 정부의 재정 건전성, 그리고 자본시장 발전을 동시에 이룬 성공 사례가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이다. 1992년 도입된 이후 현재 약 4006조원 규모로 성장했으며,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연 7.9%로 한국의 세 배에 달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 없이 근로자들이 자동으로 가입하게 되는 슈퍼애뉴에이션은 신탁법에 근거한 기금형 구조로 운영되며 고용주는 근로자 급여의 12%를 의무적으로 납입하고 근로자는 기금과 상품을 직접 선택한다.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성과 기반의 경쟁 체계다. 2021년 도입된 'YFYS' 제도는 8년 평균 순투자 수익률이 벤치마크 대비 0.5%포인트 이상 낮은 기금에 페널티를 부과하고, 2년 연속 탈락 시 신규 가입자를 받을 수 없다. 2018년 200여 개였던 펀드가 현재 96개로 줄면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어 비용률은 내려가고 수익률은 올랐다. 디폴트옵션인 '마이슈퍼'는 원리금보장 상품을 포함하지 않으며 위험자산 비중은 70%에 달한다. 머서 CFA 글로벌 연금지수에서 호주는 48개국 중 6위, 한국은 41위다. 제도의 차이가 그대로 순위로 드러난 결과다. 노후보장에 있어 정부는 저소득자에 대한 기초 연금만을 담당하게 되므로 복지 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운용 자산 규모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더불어 호주 자본시장도 이에 상응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고 있다.
2026년 2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는 모든 사업장의 퇴직급여 사외 적립을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DC형에 기금형 퇴직연금을 선택지로 추가하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운용 주체를 둘러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단순한 선택지 추가에 그친다면 실질적인 수익률 개선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대한 노사정 합의가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네 가지 방향의 제도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째, 금융회사의 영업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수탁법인이 오직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 운용을 결정하는 독립적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금융기관이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하는 형태라면 기존 계약형과 본질적 차이가 없다.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의 성공이 바로 이 독립성에 기반하고 있다. 둘째, 기금형하에서도 디폴트옵션이 초저위험 상품 중심으로 유지된다면 수익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호주의 마이슈퍼처럼 장기 분산투자가 기본이 되도록 디폴트옵션을 전면 재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할 체계적인 가입자 투자 교육도 병행해야 한다. 셋째, 호주 YFYS처럼 기금 간 수익률을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기준 미달 기금은 구조조정되는 성과 기반 경쟁 체계와 투명한 공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가입자가 클릭 한 번으로 수익률·수수료·비용 구조를 비교할 수 있는 정보 인프라도 갖춰야 한다. 넷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의 가입 대상을 현행 30인 미만에서 300인 미만으로 확대하고, 수탁법인인 근로복지공단의 운용 역량을 대폭 강화하며, 정부 지원도 한시적 수수료 면제를 넘어 기여금 보조 등 실질적 인센티브로 확대해야 한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소득 보장의 핵심 축이다. 500조원을 넘어선 적립금은 의미 있는 성취지만 법이 약속한 목표는 아직 요원하다. 독립적 지배구조, 장기 수익률을 추구하는 투자 구조, 성과 기반의 경쟁 체계가 삼위일체로 갖춰질 때 비로소 한국의 퇴직연금은 스무 살 나이에 걸맞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전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 전 기업지배구조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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