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및 반도체 열풍을 타고 한국 증시가 월가의 새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주가 급등을 넘어, 두 회사 지분을 보유한 SK스퀘어·삼성생명 등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종목까지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2년 전만 해도 일본 증시 재평가에 쏠렸던 해외 자금의 시선이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14일 뉴욕발 기사에서 "뉴욕 거리를 걸으면 음악, 음식,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의 인기를 실감한다. 월스트리트도 마찬가지"라며 기관과 개인 가릴 것 없이 한국 주식 투자에 빠져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는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소른 인베스트먼트 컨퍼런스'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헤지펀드의 축제'로 불리는 이 행사는 신예부터 베테랑까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투자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자리다. 헤지펀드 페르텐토 파트너스의 에두아르도 마르케스는 무대에 올라 "요즘 내가 빠져 있는 일은 한국 주식 속에 숨어 있는 복합적인 가치투자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보면 한국 반도체주는 여전히 저평가 영역이다. 닛케이에 따르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예상 주가수익비율(PER)은 각각 6배로, 미국 경쟁사 마이크론테크놀로지(9배)를 아직도 밑돌고 있다. 하지만 마르케스가 주목하는 것은 이 PER 격차가 아니다. 그는 "PER 비교는 서구권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방식"이라며 "훨씬 더 크게 디스카운트된 종목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종목은 투자회사 SK스퀘어와 보험사 삼성생명이다.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주요 주주다. 닛케이에 따르면 두 회사의 시가총액은 각각 보유 중인 메모리 기업 지분 가치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한국 재벌 특유의 지분 상호보유 구조 탓에 오랫동안 방치돼 온 디스카운트 요인이 월가 투자자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적인 가치투자 기회로 보이는 셈이다.
한국 정부가 기업의 자본 효율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투자자들의 기대를 키우고 있다. 정부가 추진해 온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맞물려 그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지주사·보험사 저평가 구조가 해소될 수 있다는 기대가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일본 증시가 최근 몇 년간 도쿄증권거래소의 자본 효율 개선 압박과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세 속에 재평가받았던 것처럼 한국 시장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시각이다.
AI 메모리 호황이 한국 내수 소비로 번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됐다. 닛케이에 따르면 프레전트 레이크 파트너스의 조너선 레넌은 최근 한국에서 전직 삼성전자 직원들을 다수 취재한 뒤 삼성전자가 경쟁사와 마찬가지로 영업이익의 10%를 보너스로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우리 계산으로 두 회사의 보너스 총액은 400억 달러(약 60조 원)에 이르며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라며 "전례 없는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들의 자금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미국 운용사 라운드힐이 4월 초 내놓은 메모리주 상장지수펀드(ETF)에는 한 달여 만에 6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몰렸다. 닛케이는 2024년 비트코인 ETF를 웃도는 역대 최단기 유입 속도라고 전했다. 이 ETF 보유 자산의 절반 가까이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다.
한국 주식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통로 또한 넓어지고 있다. 미국 인터넷 증권사 인터랙티브 브로커스는 지난 7일부터 한국거래소 상장 주식 거래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동안 미국 투자자들의 한국 주식 접근은 주로 ETF나 미국예탁증서(ADR)에 한정됐지만, 이제는 개별 한국 주식 투자로 선택지가 넓어진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 증시 고평가 부담과도 맞물려 있다. 마르케스는 "아무리 인공지능을 믿는다고 해도 미국 주식의 밸류에이션은 매우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미국 S&P 500 지수는 13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예상 PER도 21배대로 과거 15년 평균인 17배대를 크게 웃돌고 있다. AI 성장 스토리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미국 주식만으로는 추가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다는 인식이 한국 등 대체 투자처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일본 시장과의 대비다. 닛케이는 이번 소른 컨퍼런스에서 일본 시장이 거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2년 전만 해도 일본 주식 행동주의 투자자가 강연자로 나서는 등 일본 시장이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의 일본 주식은 "이야깃거리가 동났다"고 닛케이 스스로 짚었다.
투자은행(IB)과 증권사들의 행사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홍콩 CLSA는 6월 서울에서 새로운 투자자 행사인 '동북아시아 포럼'을 연다. 반면 2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기존 '재팬 포럼'은 명칭을 바꾸고 축소 개최될 것으로 보인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아시아 증시의 간판 행사를 도쿄에서 서울로 옮기는 듯한 움직임은, 글로벌 IB가 바라보는 동북아 자금 흐름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 머니를 끌어들이기 위한 동북아 증시 간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지가 '일본 주식은 소재 고갈, 한국 주식은 새 투자 아이디어'라는 구도를 전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의 한국 증시 랠리가 단순한 반도체 호황을 넘어 글로벌 자금의 동북아 배분 지형 변화로 읽히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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