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속도에 갇힌 25조…전쟁 추경의 위험한 설계

국회 본회의장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국회 본회의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정부와 여당이 25조 원 규모의 이른바 ‘전쟁 추경’을 추진하고 있다. 중동 사태에 따른 고유가·고환율·고물가의 ‘삼중 충격’에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고유가 대응, 공급망 안정, 산업 피해 최소화, 취약계층 지원이라는 방향 설정도 크게 틀리지 않다. 문제는 지금의 추경이 과연 ‘전쟁’에 걸맞은 전략을 담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번 추경의 가장 큰 특징은 ‘속도’다. 정부와 여당은 4월 10일 본회의 처리를 목표로 “역사상 가장 빠른 추경”을 공언하고 있다. “골든타임”, “전시 상황”, “방파제”라는 표현까지 동원됐다. 위기 대응에서 속도가 중요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속도가 정책의 전부가 되는 순간, 재정은 전략이 아니라 이벤트로 전락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재원의 구조다. 이번 추경은 추가 국채 발행 없이 초과세수로 충당하기로 했다. 외환시장과 금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계산이다. 겉으로 보면 재정 건전성을 고려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정책의 지속성을 약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초과세수는 안정적인 재원이 아니다. 경기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동한다. 특히 지금처럼 글로벌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지고, 기업 실적이 흔들리는 국면에서는 법인세 기반 세수는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회성 재원으로 위기 대응을 설계하는 것은 단기 처방에는 유효할 수 있지만, 구조적 위기 대응에는 적합하지 않다.
 
내용 역시 문제다. 정부는 고유가 대응과 민생 안정, 산업 지원을 내세웠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상당 부분이 유류비 보조, 물류비 경감, 직접 지원 등 단기 처방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 충격이 아니다. 에너지·공급망·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적 위기’다. 국제 유가 상승은 단순히 기름값 문제가 아니라 제조업 원가, 물류 비용, 수출 경쟁력 전반을 뒤흔드는 변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보조금이 아니라 구조 전환이다.
 
예컨대 에너지 대응만 보더라도, 단기 유류세 인하나 지원금 확대를 반복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에너지 믹스, 비축 전략, 산업별 에너지 효율 구조까지 포함한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추경에서는 이러한 중장기 구조 대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차등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취약계층과 지방에 더 많은 지원을 하겠다는 방향은 타당하다. 하지만 선별 지원은 행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정책이다. 대상 선정 과정에서의 논란, 집행 지연, 정책 신뢰 훼손 가능성까지 감안해야 한다. 속도를 강조하면서 정밀성을 요구하는 정책은 현실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산업 지원 또한 아쉬운 대목이다. 공급망 안정과 수출 기업 지원이 포함됐지만, 지금 글로벌 산업 환경은 이미 ‘전쟁’ 수준의 재편 국면에 들어섰다. 반도체, 배터리, AI, 에너지 등 핵심 산업에서 각국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며 산업 지형을 바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 유동성 지원 중심의 추경으로는 경쟁력 확보에 한계가 분명하다.
 
더 우려되는 지점은 정책의 신뢰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전쟁 추경’이라는 강한 프레임과 ‘유례없는 속도’가 결합되면서, 시장은 이를 순수한 위기 대응으로만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재정이 정치 일정과 맞물리는 순간, 정책의 효과는 반감된다.
 
재정은 숫자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신뢰는 속도가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다. 지금 한국 경제는 단기 경기 대응을 넘어서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에너지 안보, 공급망 재편, 산업 경쟁력이라는 세 축에서 근본적인 전략을 세우지 못한다면, 추경은 반복될 뿐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25조 원은 위기를 막기에는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바꾸기에는 부족하다. ‘전쟁 추경’이라면 답은 분명하다. 속도가 아니라 구조, 단기가 아니라 전략, 그리고 정치가 아니라 경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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