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
“돈이 휴지 조각이 되고 있다.” 요즘 각종 미디어 등을 통해 흔히 접하는 표현이다. 주식, 부동산, 금, 비트코인 등 각종 자산가치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적으로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면서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자산가치가 오르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돈이 있는데, 그게 원화다. 다른 나라 통화보다 유독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환율이다. 역사적으로 원·달러 환율 평균치는 1100원 수준이었다. 2025년 들어 평균 환율이 1400원 수준으로 올라선 모습이다. 과거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일시적으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다시 평균 환율로 돌아갔던 모습과도 상당히 다르다. 점진적으로 환율이 올라서 1450원 선에서 맴도는 모습이다. 특히 1400원 수준의 고환율이 장기화한 경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고환율 장기화 현상’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줄지 진단하고 대응책을 모색할 시점이다.
고환율 장기화는 K자형 양극화를 초래한다. 첫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심각하다. 고환율이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달러 기반으로 수익을 영위하는 경제주체들은 고환율 파티에 취하고도 있다. 수출기업들은 환율이 올라갈수록 채산성이 올라간다. 더욱이 높아진 관세율을 환율이 상쇄시켜 주는 효과도 발생한다. 실제 2025년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역대 최대 수준에 이르고 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을 고려하면 고환율이 경제성장에 부정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반도체, 자동차, IT 기기, 조선 등 수출 대기업들은 성과급 파티를 진행 중이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고환율이 더 지속되면 정말 죽을 지경이라고 성토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경제는 주로 대기업들이 수출을, 중소기업들이 수입을 담당하는 구조다. 중소기업들은 해외에서 각종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하여 일부 가공하고, 대기업들에 납품하는 공급업체들이다. 장기계약을 통해 납품하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환율이 계속 올라가면 공급업체들의 마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제 유가가 하락함에도 주유소 평균 가격은 오히려 상승하고 있는 흐름이 고환율 장기화에 따른 수입업체들의 부담을 여실히 보여준다. 계약을 지켜내지 못하면 고객사를 잃을 수 있기에 중소기업들은 역마진을 감수하기도 한다.
사실 같은 물가 상승 압력에도 그 부담은 저소득층에게 더 가중된다. 저소득층일수록 평균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이다. 평균소비성향은 한 가구가 벌어들인 소득 중에서 얼마만큼을 소비지출 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즉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계산한다. 2025년 3분기를 기준으로 1분위 저소득층은 96만5000원의 처분가능소득으로 118만8000원의 소비지출을 하고, 5분위 고소득층은 776만9000원의 처분가능소득 중 426만2000원을 소비지출한다. 저소득층의 경우 부족한 소득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부채에 의존하고 있다. 물가 상승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생계에 가혹한 부담으로 작용해 두렵기마저 하다. 반면 고소득층의 소비지출액이 저소득층보다 크지만 평균소비성향, 즉 소득 대비 비중은 작으므로 물가 상승이 딱히 부담스럽게 작용하지 않는다.
고환율 장기화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즉 고환율이 고환율을 장기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원화 약세를 불러온 요인들을 보자. 첫째, 기업들이 수출 후 달러를 본국으로 회수하지 않고 있다. 둘째, 가계가 해외 투자를 늘리고 있다. 셋째, 국민연금 등과 같은 기관들이 해외 투자 비중을 늘리고 있다. 넷째,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을 매도하고 있다. 이렇게 달러가 빠져나가기만 하고 국내로 들어오지 않는 현상은 고환율이 지속될수록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고환율은 내수경기를 악화시키고, 더욱 강한 유동성 공급을 불러오며, 이는 다시 고환율을 장기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실 고환율 장기화의 주범은 유동성이다. 앞에 거론한 달러의 수급과 관련된 사안들도 고환율을 초래한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중대한 요인은 유동성 공급 속도다. 미국도 유동성을 빠른 속도로 공급하고 있어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데 한국의 유동성 공급 속도는 그 이상이기 때문에 원화 가치가 더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가장 범용화된 광의 통화량 지표인 M2 증가율은 미국이 4.8%인데 한국은 8.7%다. 고환율이 장기화할수록 내수경기는 피폐해지고 경기 부양을 위해 더 많은 유동성 공급이 이어지게 될 수 있다. 고환율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고환율 악순환 돌파구
첫째, 고환율을 일으킨 궁극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고환율의 주된 원인은 유동성에 있다. 통화량 공급을 증대시키고, 유동성을 확대 공급하는데 원화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확장 재정을 계획하고 추경을 편성하고 있다. 적자재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소비 쿠폰을 재차 지급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민생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정작 자산가치 상승과 재정건전성 악화 및 고환율의 습격을 가져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득이 있으나 실이 더 클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환율 안정을 위해서 미국의 유동성 공급 속도보다 낮은 속도로 관리하는 등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한국 원화 표시 자산에 대한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되지 않겠는가? 기업이나 서학개미는 환율 안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들이 달러 수급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원인으로 규명해서는 안 된다. 가계와 기업은 영리 추구의 주최이지 환율 안정의 주최가 아니다. 해외 주식보다 한국 주식에 투자했을 때 기대 수익이 많을 수 있다는 방향성을 제공해야 한다. 자본시장과 자산시장에 관한 세제나 제도 개편을 시도할 때도 다른 나라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셋째, 해외직접투자를 유인해야 한다. 한·미 무역 협상 결과 대규모 대미 투자를 단행해야 하는 국내 상황도 고환율을 장기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매년 약 200억 달러 수준의 투자자금이 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조선업 등 주요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기지를 완성하기 위해 직접투자를 단행할 것이다. 한국도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해외직접투자를 유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26만장의 GPU 확보와 더불어 세계 HBM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고 세계 최초 5G를 상용화한 통신 인프라와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가전, IT 기기, 자동차, 로봇에 이르기까지 피지컬 AI(Physical AI) 밸류체인을 확보하고 있다. 해외 많은 기업들이 한국에서 기술을 교류하고, 미래 산업을 연구하며, 신제품을 시범 운용하는 테스트베드(Test bed)화하면 어떨까? 돈이 빠져나가는 것 이상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K자형 경제’는 2020년 팬데믹 이후 부유층과 빈곤층이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양극화 회복을 설명하는 용어로 등장했다.
김광석 필자 주요 이력
△한양대 겸임교수 △전 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전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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