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보고타 첫 지하철 열차, 한국 외교의 숙제를 묻다

박선태 전 주페루공사 현 페루 트루리요 국립대학 명예교수
[박선태 전 주페루공사, 현 페루 트루리요 국립대학 명예교수]


70년 숙원 끝에 도착한 보고타 지하철 첫 열차는 콜롬비아 시민에게는 환희의 상징이었지만, 한국에게는 외교와 통상이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다.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해외 인프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외교적 지원과 기업의 참여가 결합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장에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오랜 기다림, 감동의 순간

2025년 9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 지하철 첫 열차가 도착했다. 80년간 정치적 갈등과 재정 문제로 좌절되던 국민적 숙원사업이 드디어 현실화된 것이다.

열차는 중국 창춘에서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 카르타헤나 항을 거쳐 수도권 도로를 달려왔다. 시민들은 마치 올림픽 성화를 맞이하듯 환호했고, 언론은 연일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보고타 시민에게 이 열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해낼 수 있다”는 상징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거대한 인프라 수요

콜롬비아는 인구 5천만 명, 수도권만 1천만 명을 넘는 거대 시장이다. 그러나 수도권 도시철도는 이제야 첫 삽을 뜬 상황이다.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IDB·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교통 인프라 투자 수요는 연간 GDP의 3~5%에 달하지만 실제 투자는 절반에 불과하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각국은 지하철·경전철·화물철도 프로젝트를 속속 추진하고 있다. 멕시코의 ‘트렌 마야’, 페루 리마 지하철 2호선, 칠레 산티아고 지하철 확장 등이 대표적이다.

보고타 지하철 1호선 역시 약 5조 원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다. 중국 기업이 이를 수주해 첫 열차를 예정대로 도착시켰고, 2호선 입찰에서도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중국의 존재감은 콜롬비아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의 부재, 아쉬움의 기록

필자는 2022~2024년 근무 시절, 한국 기업들의 보고타 2호선 참여를 위해 보고타 시장과 전철공사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한국에 초청해 벤치마킹을 주선하고, 로드쇼와 화상회의를 주재했으며, 교통부 장관의 방한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지 정부와 시민들도 한국 기업의 참여를 기대했으나, 결국 단 한 곳도 응찰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은 1호선을 성공적으로 수주했고,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콜롬비아 지하철 건설이 본격화되면 인근 국가들로도 철도 프로젝트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국은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

경제적 논리와 외교적 논리의 결합

기업들이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투자 규모가 크고 리스크가 높은 인프라 사업에서는 경제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외교적 논리다. 정책금융, 협력 프레임워크, 고위급 외교 지원 같은 장치가 있어야 기업들이 안심하고 뛰어들 수 있다.

우리는 그간 “한국전 참전”이라는 역사적 인연을 강조해왔지만, 정작 오늘의 콜롬비아가 절실히 원하는 교통 인프라 협력에는 응답하지 못했다.

기업의 무관심, 더 큰 문제

우리 기업들도 반성해야 한다. 중국은 값싼 정책 자금을 앞세우지만, 필자가 직접 수주 활동을 지원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금융 조달이 사업 성패에 미치는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상당수 프로젝트는 재정사업으로 진행된다.

실패의 진짜 원인은 무관심이다. 초기 정보 입수와 네트워킹을 소홀히 한 탓에 사전 타당성 조사나 구조 설계 단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뒤늦게 본입찰만 바라보다 “중국에 밀렸다”는 핑계를 댄다. 이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시장에서 영영 자리잡기 어렵다.

제도적 허점, 이제는 고쳐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인프라 사업의 재원은 세계은행, IDB, 안데스개발은행(CAF), 유럽투자은행(EIB) 같은 다자개발은행이 주도한다. 한국은 IDB 가입을 오랫동안 주장해왔지만, 가입 이후 실제로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워싱턴 본점 파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업 설계와 자금 배분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야 한다.

해외 인프라 진출을 위해 세운 KIND도 컨설팅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제금융기관과 연계해 프로젝트 구조화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뛰어야 한다.

또한 인프라 G2G 사업과 상품 수출 G2G 사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상품은 가격과 품질이 중심이지만, 인프라는 장기간의 재원 조달과 위험 분담, 정치·외교적 뒷받침이 필수다. 그런데도 인프라 사업의 계약 주최를 코트라가 맡아온 현실은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코트라는 무역·상품 수출에는 강점이 있지만, 인프라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계약 협상 전문 기관은 아니다. 따라서 외교부·산업부·국토부와 KIND, 민간 기업이 함께 움직이는 종합 플랫폼으로 전략을 재편해야 한다.

감동의 원리, 그리고 우리의 선택

사람 사이 관계에서도, 국가 간 외교에서도 가장 큰 감동은 상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에 손을 내밀 때 생긴다. 보고타 시민들이 첫 열차를 환호로 맞이한 것도 바로 그 절실함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제 말로만 참전과 보훈을 외칠 것이 아니라, 콜롬비아가 지금 원하는 실질적 협력 의제에 응답해야 한다. 교통 인프라, 기술 협력, 인력 양성 같은 분야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증명할 때, 비로소 미래지향적 양국 관계가 가능하다.

보고타 시민들이 첫 열차를 환호로 맞이하던 장면은 한국에도 울림을 남겼다. “말이 아니라 실행으로 증명하라.”
그 울림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이제 우리의 전략과 선택에 달려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전 주콜롬비아공사 ▷국가철도공단 글로벌대사 ▷콜롬비아Dentons 법무법인 고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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