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너무 늦게 오셨네요.” 지난 7월 24일, 한국 대표단이 미국 정부와 처음으로 관세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미측의 첫마디였다. 이미 일본, EU 등 주요국들은 한발 앞서 협상을 마무리한 상황. 새 정부 출범 이후 늦어진 협상팀 구성 탓에 마감 시한인 8월 1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1주일이 전부였다.
협상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1주일 동안 무려 6차례의 공식 회담을 이어가며, ‘압축적이고 밀도있는’ 논의와 끈질긴 설득을 반복했다. 미국 측의 돌발 일정 취소, 예기치 못한 협상 변수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논의를 이어갔다. 마침내 7월 30일, 극적인 타결 소식이 전해졌다. 피 말리는 1주일, 168시간의 치열한 협상전이었다.
협상 이론으로 본 한미 관세 협상
국제 통상협상의 결과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협상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성공이라 평가할 수 있다. 협상은 본질적으로 양 당사국의 ‘이익균형(balance of interest)’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양보와 희생이 불가피하더라도, 양측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다는 점은 협상팀의 전략과 역량을 방증한다.
특히 이번 협상은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25%)라는 불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한·미 FTA 체제에서 양국 간 관세가 0%에서 출발하길 희망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보상 협상, 보복 관세, WTO 제소 등)는 모두 현실적이지 않았다. 결국 협상팀은 25%라는 불리한 출발점에서 15%로 관세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성과였다.
실제 협상 현장의 긴장감과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협상과정을 지켜보는 대통령조차 “협상의 부담감으로 이빨이 흔들릴 정도”라는 고백을 할 정도였다. 밤잠을 설쳐가며 논리와 전략을 다듬고, 상대국의 입장 변화를 예측하는 과정은 협상 당사자만이 아는 고통이다. 협상 과정의 세부 내용은 일일이 외부에 공개할 수 없어, 그 무게는 더욱 크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과에 대한 논쟁을 넘어, 그 과정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요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협상 성공의 핵심 포인트
첫째, 범부처 ‘원팀’의 강력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압축적, 전략적 협상
이번 협상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범부처 ‘원팀’ 체제와 압축적 협상력이다. 대통령실, 기획재정부, 외교부, 산업부, 농림부 등 모든 부처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2+2 협상대표 체제와 부처별 역할 분담으로 민첩하게 대응했다. 민간에서는 업종별 기업 회장들이 미측 파트너들과 소통하며 정부 협상을 뒷받침했다.
특히 협상 막바지, 대통령의 “강하게 대응하라”는 메시지는 협상팀에 큰 힘이 되었고, 미국 측에도 우리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전달했다. 미국 대통령의 돌발 메시지는 부담이었지만, 오히려 미측 요구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응 논리를 사전에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협상팀은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6차례나 미측과 만남을 가지며 ‘압축적이고 밀도있는’ 협상을 전개했다. 대표단의 헌신과 끈질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 정부 출범으로 협상팀 구성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부처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인 결과였다.
둘째, ‘선행 사례’를 뛰어넘은 미래지향적 산업협력모델 제시
이번 협상에서는 미리 타결된 일본, EU와의 협상결과가 선행사례가 되었다. 선행기준이 있으면 목표치가 명확해지는 장점이 있지만, 그 틀을 넘기가 쉽지 않다. 이번 한·미 협상에서는 한국이 15% 관세를 유지하는 대신, 3500억 달러 규모의 업종별 투자 펀드를 중심으로 한 양국 산업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기존의 틀과는 달리 양국의 장점을 살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창의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협상팀은 미측에게 “한국이 미국 산업 재건의 최적 파트너임”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이번 협상타결을 통해 조선,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바이오 등 미래 핵심 산업분야에서 양국간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 산업 부처가 주도적으로 통상 협상을 이끌면서 통상을 산업, 에너지와 연계시킨 결과이다.
셋째, ‘데드라인’을 활용한 전략적 협상
협상 마감시한(데드라인)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동시에 효과적인 전략적 무기가 되었다. 협상 시한이 다가올수록 합의 압박이 커지고, 양보가 늘어나 합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협상 이론을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협상팀은 마감시한을 앞두고 ‘상호이익(mutual interest)’과 ‘최선의 대안(best alternative)’을 충족하는 협상안을 제시해 미국을 설득하였다.
우리 측은 만약 시한 내 타결이 안 되면 우리 부담이 커질 수 있지만, 미국 측이 감수해야 할 부담도 적지 않다는 점을 파고 들었다. 결국 협상팀은 이러한 압박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성공적으로 도출했고, 불리한 시작점에서 출발했던 협상은 양국의 이익균형점 (balance of interest)에서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끝이 아닌 시작: 미래를 향한 과제
이번 협상 타결은 ‘미래지향적 산업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조선,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의 발판을 마련하며, 단순한 무역 관계를 넘어 전략적 동맹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이번 협상 타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앞으로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완결 짓지 못한 과제들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특히 새로운 ‘뉴노멀’ 무역질서 재정립, 양국 산업에 공동이익이 되는 투자구조 마련, 그리고 국내 산업 공동화 우려에 대한 중장기 대책 마련 등은 앞으로 정부가 풀어가야 할 중요한 숙제이다.
이번 한·미 관세협상은 불리한 조건, 촉박한 일정, 예측불허의 변수 속에서도 국익을 지켜낸 대표단의 헌신과 전략, 그리고 정부와 민간의 ‘원팀’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8시간, 단 1주일의 피 말리는 시간 동안 이뤄낸 극적인 타결은 한·미 양국간 신뢰와 동맹의 힘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순간이었다. 이번 협상이 한·미 양국의 상생과 미래지향적 발전의 든든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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