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에는 법보다 명함이 앞서는 풍경이 존재한다. 퇴직한 판·검사들이 변호사로 개업하면, 법정에서의 실력보다 과거 경력이 먼저 작동한다. 소위 ‘전관예우’라 불리는 이 관행은 단순한 인간관계를 넘어, 법의 공정성과 신뢰를 근본부터 흔든다.
사법발전위원회 조사를 살펴보면 더는 ‘의심’이 아닌 ‘사실’임을 보여준다. 법조직역 종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관예우가 존재한다”고 답했다. 51.6%는 “실제 사건 처리과정에서 경험했다”고 했다. 검사의 15.9%가 전관이 개입되면 “기소와 불기소 여부를 바꾼다”고 했으며, 판사의 13.3%는 “형사 재판의 결론을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홍만표 전 검사장은 퇴직 직후 단 2년 만에 200억원 가까운 수임료를 벌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은 퇴직 후 5개월 만에 16억 원을 벌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부장 판·검사 출신 전관변호사들의 평균 수임료는 일반 변호사보다 3배가량 높았다. 일반 판·검사 출신 변호사도 상당한 프리미엄을 받고 있다.
전관예우라는 바이러스는 사법을 넘어선다. 공직 퇴직자들이 감독 대상 기업에 재취업하고, 기업은 이들에게 고문료나 자문료 명목으로 수억원을 지급한다. 금융감독원 출신이 저축은행으로, 국토부 출신이 건설사로, 방통위 출신이 통신사로 직행한다. 이들은 퇴직 후에도 사실상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림자 공직자’다.
미국에선 퇴직 법관이 소송 대리 대신 중재나 공익 활동에 주력하며, 기일 외 변론이나 전화 접촉은 금지되고, 발견 시 신고 의무가 있다. 독일과 일본은 정년퇴직 후 연금생활자로 남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인기가 없고, 로펌 취업 자체만으로 논란이 되는 분위기다. 아일랜드는 퇴직 전 근무 법원에 대한 소송대리를, 홍콩은 종심법원 법관의 개업을, 싱가포르는 상급법원 판사의 모든 소송대리를 각각 영구 제한한다.
전관예우는 우연히 생긴 게 아니다. 오랫동안 국가가 저임금과 과중한 업무를 감내한 법관에게 비공식적 위로금 성격으로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해왔다. 정년까지 남으면 받을 수 있는 연금이나 처우가 낮아, 조기 퇴직 후 개업으로 보상받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전관예우는 ‘돈으로 정의를 사는’ 인식을 확산시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다. 미래 개업을 염두에 둔 법관들은 대형 로펌이나 기업에 불리한 판결을 꺼리게 되고, 배경과 연줄이 실력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은 청년들을 출발도 전에 좌절시킨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느슨한 수임 제한 규정을 갖고 있다. ‘최근 1년간 근무한 법원에 대한 수임 금지’ 정도로는 전관 구조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전관의 수임 제한 기간을 대폭 확대하거나 고위직의 경우 영구 제한해야 한다. 대형 로펌 취업 자체를 일정 기간 제한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전화변론이나 기일 외 접촉 등 비정상적 변론 행태를 더 엄격히 규제하고, 이를 발견한 경우 신고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판사·검사의 퇴직 연금과 처우 역시 현실적으로 개선해 전관예우를 기대하지 않고도 명예롭게 오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법관제로의 전환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 변호사협회, 시민사회 등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속에서 전관예우 실태를 조사하고 공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수사권 조정 이후 검찰 출신 전관이 예전만큼 환영받지 못하고 그 자리를 경찰 출신이 채우는 현상이 보인다. 권력은 공백을 싫어한다. 검찰의 전관예우를 해소하더라도 경찰의 전관예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적 대비가 필요하다.
이제는 전관예우를 끊어낼 시간이다. 사법개혁의 목적이 국민들에게 공정한 질서를 돌려주기 위해서라면 지금이 바로 전관의 권력을 구조적으로 끊고, 법의 권위가 다시 법정에서만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다. 아무리 사법개혁을 100% 완료했다고 하더라도, 전관예우가 계속 된다면 여전히 법치주의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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