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강단 앞에 선 수도사 …지적혁명의 불씨 당기다

  •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10)

 
황승연
[황승연 교수]

 
마르틴 루터는 교황과 싸운 ‘사제’라기보다는 옳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 논쟁을 피하지 않는 ‘대학교수’였다. 그는 사제였지만 ‘교구 사목 중심의 신부’는 아니었다. 그는 “나는 박사이고 교수다. 성서를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다”라고 했다. 자신이 신학박사라는 직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신학 교수로서의 사명 의식을 가졌다. 특히 그는 종교개혁 이후 그의 정체성을 사제에서 교수로 점차 이동시켰다. 수도원 제도를 비판할 때도 자신의 역할을 ‘성서를 가르치는 교수’로 규정했다. 교수를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 여겼다. 교수로서 진리를 밝혀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고 이를 하나님께 받은 의무로 이해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어원이 라틴어인 많은 단어를 일반인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바꾸었다. 우리나라에서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과 유사한 것이었다. 루터는 라틴어로 ‘vocatio’를 독일어 ‘Beruf(베루프)’로 번역했다. 이는 원래 ‘소명’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에 ‘직업’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루터였다. ‘Beruf’는 원래 수도사, 사제, 성직자들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종교적인 직업에만 해당하는 단어였으나 루터는 농부, 상인, 장인 또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영위하는 일반 직업에 대해서도 적용했다. 이때부터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가 생겼다. 루터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 즉 자신의 직업은 대학교수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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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시청앞 광장에 서 있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필자 제공)]

 
16세기의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독일 쾰른대학교, 프랑스 파리대학교 등 중세 대학들은 철저히 교회에 종속된 기관이었다. 모든 교육은 교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교수 대부분은 성직자나 수도사였다. 당시의 교회와 대학은 서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합된 형태였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인 것도 사실은 예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그가 대학교수로서 대학 내 토론을 위한 학문적 논제를 걸어놓은 것이었다. 즉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교회가 아니라 대학이었다. 대자보는 토론을 위해 당시 대학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로 작성한 것인데, 이 문서의 독일어 번역본이 인쇄되어 퍼져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종교개혁이 폭발한 이유는 루터의 신학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전 유럽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루터
 
당시 이미 금속활자로 인쇄된 많은 종류의 서적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터의 글만큼 폭발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았다. 루터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된 8~16쪽의 팸플릿 형태의 짧은 인쇄물을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이 외에도 설교집, 성경 번역 등으로 루터는 전 유럽에서 인류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이것이 시장에서 빠르게 퍼져나가 전 유럽에 흡수되었다.
 
1517년 대자보 사건 이후 거의 10년 동안 독일 인쇄물의 대부분은 루터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출판물이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브랜드 루터(Brand Luther) 현상이라 설명했다. 출판업자들은 책 표지에 ‘MARTIN LUTHER’라고 이름을 크게 써넣었다. 이름만으로도 책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저술을 찾는 독자들이 생긴 것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책의 판매는 내용 중심보다는 저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루터는 책을 썼다기보다는 루터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것은 공론장 형성에도 기여했다. 그의 저술과 출판에 대한 기여는 대학교수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루터가 대학에서 했던 강의들은 나중에 출판된 책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강의 내용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것이 대학교수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루터의 영향이다.
 
토론과 논쟁의 대학 강의실
 
루터는 수업에서 논쟁을 통한 학생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장려했다고 한다. 루터는 수업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감정적 표현이 많았고, 현실 사례를 사용했고, 논쟁적인 방식으로 강의했다. 그의 동료 교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그의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교수나 학생이 논제를 제시하고 반박과 재반박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세미나 방식은 당시 대학 교육의 핵심 방식이었고 지금까지 독일 대학의 수업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루터의 혁명은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강의는 토론과 논쟁이 끊이지 않는 지적 전투 공간이었다. 사상이 충돌하는 공개 토론장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논쟁이 가득 찬 대학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강의실에서 나온 논쟁의 내용은 인쇄된 책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종교개혁은 변방 도시의 무명 대학교수와 인쇄술이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루터는 교황을 무너뜨림으로써 대학교수의 힘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 신설 대학인 비텐베르크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 브랜드를 보유한 대학이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적 영향력을 지닌 곳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2년 교수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34년 동안 대학교수였다. 그는 교수 초기에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항상 강의실이 만원이었다. 또 그는 학생들과 공개토론을 자주 진행했다. 라틴어 강의였지만 설명이 매우 명확하고 성서 해석이 혁신적이고 논쟁적이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교수로서 성경을 해석하다 발생한 결과였다. 루터 이후에 교수의 역할이 바뀌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유럽을 바꾼 대학교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
 
루터의 강의에 외국에서 온 유학생 수강생들이 많았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4대 비극에 속하는 드라마 햄릿은 무대가 덴마크인데 고뇌하는 인간 주인공 햄릿 왕자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비텐베르크 대학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대학이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루터의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루터는 유럽 최초의 ‘스타 교수’였다. 그의 교수로서 고민은 오늘날 교수의 고민과 같았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말만 많고 이해는 부족하다”며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판했다. 그가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성서를 직접 읽어라. 언어를 배워라. 깊이 이해하라”였다. 루터는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학생을 걱정하고 강의를 고민하는 전형적인 대학교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대학을 망쳤다”며 공허한 논쟁을 비판했다.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 기록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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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옛 대학건물 LEUCOREA (필자 제공)]




루터 이후에 유럽에서 교수의 역할은 크게 바뀌었다. 루터 이전의 교수는 교회 학자였으나 종교개혁 이후의 교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공적, 사회적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모델로 등장했다. 루터 이후 교수들은 대학개혁을 주도했다. 그들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와 성서 원문 연구를 중심으로 대학의 커리큘럼을 개편했다. 대학은 성직자를 교육하고 행정 관료를 교육했다. 또 제후들은 국가를 운영할 때 필요한 인재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대학을 세웠고 대학의 역할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1502년에 작센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der Weise, 1463~1525)’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신설 대학은 루터의 대자보 사건 이후 불과 수년 만에 유럽 지성의 중심지로 변했다. 변화는 단순히 명성이 높아졌다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의 기능과 구조와 역할 자체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 수도 급증했고 외국 유학생도 많아졌다. 유럽 신학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루터의 강의는 더 이상 대학 강의가 아니라 유럽 전역의 관심사가 되었다. 강의에서 다룬 논쟁거리가 즉시 인쇄되어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강의실이 곧 출판 콘텐츠의 생산지였다. 여기에 돈을 벌려는 목적의 출판업자들이 뛰어들어 책을 더 빨리, 저렴하게, 예쁘게, 가볍게 만들어 유통시켰다. 교수는 이제 대학 내 학자 혹은 라틴어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공적 지식인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인물이 되었다.

대학은 교회에 속한 단순한 교육기관에서 정치와 종교 정책의 중심 기관이 되었다. 국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비텐베르크 대학은 유럽 신학의 중심으로 변하면서 지식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고 지식을 저장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기관이 되었다. 작센주 작은 시골 마을 신설 대학의 강의실에서 시작된 논쟁이 인쇄물을 통해 유럽 전체를 흔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개인의 시대, 즉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내세우는 전 세계의 모든 대학은 지금도 마르틴 루터가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서 발전하고 있다.
 
* 이 열 번째 칼럼을 끝으로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마르틴 루터의 여정에 함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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