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철 글로벌비지니스연구센터 원장]
올해는 한·일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6월 22일을 기점으로 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다시 갑(甲)으로 돌아가는 환갑을 맞이한 셈이다.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양국 주재 대사관 중심으로 조촐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 측이 우리보다 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주일 한국대사관이 도쿄에서 주최한 국교 정상화 기념행사에 이시바 시게루 현직 총리를 비롯해 다수의 전직 총리와 정·재계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과거보다 더 나은 한·일 관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공동 행사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양국 관계가 여전히 미지근하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의 한·일 관계를 냉정한 잣대로 평가해보면 마치 물과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겉돌고 있는 형국이다. 양국의 곳곳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려는 표면적이고 잠재적인 수요가 용트림 트고 있지만 큰 틀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이 근간에는 크게 두 개의 상존한다. 하나는 역사적 문제에 대한 청산 미비이고, 다른 하나는 양국 정치 세력의 미묘한 줄다리기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해묵은 이슈로 끝없이 공전하면서 평행선을 달린다. 한동안 들어가 있다가도 관계가 틀어지면 여전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인들이 양국 관계를 정치적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여 수시로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일시에 냉랭한 분위기로 둔갑시키곤 한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은 관계의 연장선에서 최근 양국의 민간, 특히 경제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전 세계에서 협력 시너지가 가장 큰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반환점인 60년을 넘어선 시점에서 외부 강요가 아닌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오고 있는 진단이고 보면 충분히 새겨들을 만하다.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하에서 양국이 처한 애로나 기회의 입장이 매우 유사한 선상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백지장이라도 맞들면 상호 이익을 확대해 나갈 수 있지만 엉거주춤한 관계를 복원시키지 않으면 둘 다 중심이 아닌 변방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공통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양국 정부가 60주년 구호로 “두 손을 맞잡고 더 나은 미래”로 설정한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이 시점에서 지난 60년의 한·일 관계를 되짚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반 30년은 양국에 모두 유익한 시기였다. 일본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으로 올라가기도 했고, 한국은 일본과의 경제 교류 확대를 통해 고도성장과 수출 강국으로 등극했다. 반면에 후반 30년은 일본의 경제적 후퇴와 일부 주력산업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면서 경제적 연결 고리가 상당 부분 약화하였다. 한편으론 일본과의 협력이 감소하더라도 한국 경제가 홀로 설 수 있다는 자만감까지 생겨났다. 이 과정에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본류로 빠르게 편입되면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의 원천이 바뀌었던 점도 한몫을 했다. 온통 중국만 보이고 일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중국에 밀착하는 만큼 일본과는 상대적으로 멀어졌다.
‘국익 중심 실용 외교’의 출발점은 한·일 관계의 획기적 복원
그러나 근래 10년 사이에 이미 예측된 현상이기도 했지만 의외로 빨리 엄중한 현실로 다가왔다. 중국의 놀라운 부상이다. 중국은 일본과 한국을 추월하고 이제 미국과 대등한 패권 다툼에 이르는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과 일본은 더 초라하게 전락하고 괴리는 더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양국이 힘을 합쳐도 중국을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라고 보는 것이 냉정한 평가다. 막강해진 중국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군사·안보적 위협이 한층 가중되고 있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북·중·러가 가까워지고 있는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한 한·일 양국이 이를 도외시하고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양국 미래가 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어려움에 부닥친 국가끼리 서로 동정하고 돕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민간 교류 양상을 보면 이런 기류를 타고 있다. 한국인이 일본 관광을 먹여 살린다는 시쳇말이 나온다. ‘노노 재팬’은 옛말이고 앞다투어 일본을 찾는다. 이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방한 일본인의 수도 올해 들어 증가 추세다. 또 하나 고무적인 것은 일본 소·부·장 기업의 한국 투자 봇물이다. 한국의 응용 기술과 일본의 기초 기술을 융합하려는 목적으로 반도체 부문을 위시하여 작년에만 무려 375% 증가한 61억 달러에 달했다. 외국산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일본 가전·차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의 침투가 가시적이다. 일부 가전은 10%대 점유율을 확보했고, 난공불락인 자동차 시장에서도 청신호가 들린다. 이에 따라 매년 200억 달러 이상 나는 대일 무역적자가 줄어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미·중 충돌, 트럼프발(發) 무역 전쟁에 이어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중국발(發) ‘레드 테크’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 한·일 간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고 필연이다.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돌파구를 찾는 가장 현명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양국이 확보한 경제적 장점을 효율적으로 결합하면 제2의 전성기라는 가도를 만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반도체·자동차·철강·배터리·조선·AI·로봇 등 협력 가능 분야도 무궁무진하다. 일본이 더 적극적이다. 한국 재계에서 주장하는 2억에 달하는 양국 내수 시장의 전격적 통합도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 이러한 민간의 분위기나 움직임을 획기적으로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정치 관계의 복원이 시급하다. 양국 내 여론이 이를 충분히 백업한다.
김상철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경제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Business School Netherlands 경영학 박사 △KOTRA(1983~2014년) 베이징·도쿄·LA 무역관장 △동서울대 중국비즈니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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