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갤러리 한옥에 왕이 거꾸로 매달렸다. 과거 사람들은 임금 왕(王)자를 쓴 종이를 대문, 기둥 등 집안 곳곳에 붙였다. ‘거꾸로 해도 王’인 절대지존 왕이 귀신까지 쫓아내는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며 손바닥에 '王'자를 썼던 누군가 역시 이러한 믿음에서 그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오는 7월 20일까지 국제갤러리 한옥에는 전통의 잔여물들이 머문다. 서까래엔 임금의 얼굴이 매달렸고(뒤집힌 왕), 벽엔 괴이한 괴석도가, 창가엔 남향을 알리는 나침반(사방이 탁 트인 남향)이 놓였다. 경복궁 전각들이 대체로 남향으로 지어졌듯이 이 한옥 역시 전통의 양기가 흐르는 길한 곳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수묵화가 그려진 화강암 빨래판은 마치 석탑처럼 중정에 고즈넉함을 더한다.

기획전 <아득한 오늘>은 ‘멀고도 가까운’ ‘희미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제도 밖 전통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하고 변화하는지를 묻는다. 이 전시에 출품된 김범, 임영주, 조현택, 최수련, 최윤 등 다섯 명 작품은 과거 추억의 만화영화 <꼬비꼬비>를 상기시킨다. 빗자루, 깨진 사발, 옥반지, 꽃신 등에 서려 있던 도깨비들이 땅속에 묻혔다가 어느 날 아파트 공사로 다시 세상에 갑자기 나온 모습이라고 할까.

이 전시를 기획한 박찬경은 글 <아득한 오늘>에서 김수영이 시 <거대한 뿌리>를 통해 ‘歷史(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말한 점을 짚는다. 김수영은 이 시에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反動)이 좋다’고 노래한다.
박찬경은 “김수영의 요강, 망건, 장죽은 완전히 잊힌 것이 아니라 현대의 바깥에 남아 있는, 길들여지지 않은, 현대는 물론이고 전통 스스로 배제하거나 수준 낮은 것으로 취급해온 전통이 불현듯 돌아오는 순간을 말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겉에서는 단절로 보이는 것도 속에서는 단절을 모르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 지속되리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능력을 무의식, 상상력, 영매 등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겠다. <아득한 오늘> 전의 작품들은 대체로 이러한 관심 속에서 선별한 것”이라고 밝힌다.

급격한 근대화로 전통과 현대 사이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이 땅에서 작가들은 아득히 먼 전통의 잔여물들을 불러냈다. 민속 신앙의 잔재들은 발길이 끊긴 이름 모를 공간에 유령처럼 기이한 풍경(조각난 두상들)을 만들었다. 또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는 귀신 설화는 동양화와 함께 서양의 재료로 캔버스(섭포의 노래)에 담겼다. 나(I)보다 갤럭시로 상징되는 자연과 우주를 앞세우는 정신은 도자기로 구현한 텔레비전(3성TV은하46″)과 휴대폰(내 손안의 더 큰 세상)에서 꿈틀거리고, 공식 기록에는 이름을 못 남겼으나 원효와의 사흘밤 로맨스를 통해 존재가 입으로 전해진 요석 공주는 현대의 풍경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요석공주)로 되살아났다.

전시 공간인 국제갤러리 한옥 역시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선 공간이다. 1970년대에 개량된 후 2022년께 대대적인 새 단장을 거친 이 한옥에는 현대미술이 자리한다. 그렇기에 이 한옥은 전통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또 현대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모호하다.
박찬경은 '유령'을 불렀다.
“사진술이 발달한 초기에는 사진이 혼을 빼간다거나, 때로 사진에 유령이 찍힌다고 여겨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완벽하게 비과학적인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 조현택의 이 사진들에서도 유령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유령이 이렇게 물을 것 같다. '다 없애버리니 편안하신가?' 만약 아직도 유령이 나온다면 다행히 아직 다 없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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