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대표 반도체 설계(팹리스) 업체와 서버 제조업체가 25일 합병을 선언했다. 중커하이광(中科海光, 영문명·Hygon 하이곤)과 중커수광(中科曙光, Sugon 수곤) 이야기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가 거세진 가운데, 업스트림부터 다운스트림까지 상호 자원을 통합해 중국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해석됐다.
26일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에 따르면 하이곤과 수곤은 전날 저녁 중국 상하이거래소 공시를 통해 하이곤이 수곤의 지분을 전량 매입하는 방식으로 흡수 합병한다고 밝혔다.
올해 1분기말 기준 하이곤과 수곤의 총자산은 각각 310억 위안과 359억 위안이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670억 위안 (약 12조8000억원) 자산 규모의 거대한 반도체 상장사가 또 하나 탄생하는 셈이다. 해당 거래는 현재 당국의 승인만 남겨두고 있다.
하이곤은 중앙처리장치(CPU)를 비롯한 다양한 다양한 반도체를 설계하는 중국 대표 팹리스 업체다. 2016년 미국 팹리스 업체 AMD와 협력해 중국에서 x86 아키텍처 기반의 CPU도 생산했다. 하이곤 칩은 중국 통신·금융·인터넷 산업의 데이터센터는 물론, 빅데이터·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방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이곤의 최대 주주가 바로 수곤이다. 수곤은 2006년 텐진에서 시작한 서버·메모리·클라우드컴퓨팅 등 방면의 IT 인프라 솔루션 업체로, 최대주주는 중국 정부 산하 과학 학술자문기관인 중국과학원 산하 국유자산업체다.
시장은 최근 중국내 AI 모델, 자율주행 등의 폭발적인 성장세로 컴퓨팅 성능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양사의 합병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성링하이 연구 부총재는 차이신에 “오늘날 시장 경쟁은 CPU·GPU(그래픽처리장치) 등 반도체끼리가 아닌, 전체 컴퓨팅 시스템 성능을 놓고 벌어지고 있다”며 “하이곤과 수곤의 합병은 업스트림과 다운스트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간 협업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다. 이는 엔비디아·AMD·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이 장악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산 의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실제 최근 전 세계적인 사례를 봐도, 팹리스에서 출발한 엔비디아가 자체 서버를 출시하는 등 AI인프라 공급자로 도약을 시도하는가 하면, AMD도 최근 서버 제조사 ZT시스템을 인수하는 등 IT 생태계 주도권을 유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성 부총재는 “게다가 2019년 미국 상무부의 제재 목록에 오른 하이곤과 수곤 모두 향후 연구개발과 시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며 “양사가 합병을 통해 더 많은 재정 및 인적 자 지원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진단했다.
실제로 수곤은 최근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업계 경쟁까지 심화하면서 실적 성장세가 크게 둔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수곤의 매출은 131억 위안으로 전년 대비 8.4% 감소했다. 순익은 19억 위안으로 4%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이곤 역시 미국 제재로 어려움에 맞닥뜨린 건 마찬가지다. 중국의 한 반도체 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차이신에 “미국의 제재가 강화하면서 AMD도 더 이상 하이곤에 차세대 x86 칩에 대한 라이선스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이곤도 향후 독자적인 연구 개발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인만큼 상당한 투자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