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장면 1. “날씨 더운데 방탄조끼 입고, 방탄유리 안에서 애쓰지 말고…감옥 앉아 있으면 방탄유리도 필요 없습니다.” 칼침을 맞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야당 후보가 방탄유리를 두르고 유세하는 모습을 비아냥거리는 여당 정치인의 품격이 드러나는 발언이다. 여기에 덧붙여 자신의 허세를 세상에 과시한다. “저는 이렇게 방탄유리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방탄조끼도 안 입었어요.” 테러행위의 피해자가 재발방지를 위해 자기보호 조치를 취하는 것을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다.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파시즘적 사고의 단면이자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가해자 중심주의의 표현이다. 윤석열이 꿈꾸던 ‘내란사회’는 피해자는 숨고 가해자는 거리를 활보하는 사회이다.
장면 2. 베트남 여성 황하가 “잔뜩 부어오른 눈두덩이 위아래로 시커먼 멍과 함께 목과 귀, 머리 쪽에 할퀸 자국이 선명”하고 “발갛게 멍든 손목과 무릎, 부어오른 팔뚝”(오마이뉴스)이 드러날 정도로 회사 부장에게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사장은 이 일로 근무처를 변경하면 이직 횟수 초과로 불법 체류가 되기 때문에 가해자와 합의해야 한다고 겁박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의 대응은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신고를 접한 용인고용복지플러스센터는 “고용주의 상해행위가 아닌 직원의 우발적인 행위로 발생한 사건이라 고용변동 신고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이직신청을 접수하지 않았다. 국제인권단체들은 20년 전부터 한국정부에게 이주노동자 인권 보호와 사업장 이동자유의 보장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안전의 결핍은 일상이다. 이제는 안전사고를 접할 때마다 탄식하던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에 대해서조차 불감증을 호소해야 할 만큼 안전불감증이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내란의 조기종식이 내란 책임자 처벌을 덮고 지나가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내란 당시 대다수 국민이 느꼈을 공포에 대한 기억이 대선 국면에서는 마치 잊혀진 것처럼 ‘내란 정당’과 ‘내란 수괴 지지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30%를 웃도는 현실은 반인륜적 국가폭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안전 가치에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가 내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생활 속에 스며있는 피시즘적 경향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굳건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학교폭력, 직장폭력(갑질),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디지털 폭력, 아동폭력, 성폭력 등 한국사회의 고질병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폭력을 근절하는 것이 안전한 대한민국의 첫 번째 조건이다. 학교폭력 예방 전문기관인 푸른나무재단이 지난 22일 발표한 ‘2025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100명 중 3명은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됐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피해자들이 숨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쌍둥이 자매의 학폭사건은 물론 간혹 유명 연예인이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로 뒤늦게 밝혀지는 사례들은 폭력 피해자들이 숨을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의 결과이다. 피해자가 겪게 될 폭력 후유증보다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을 경우 장래 사회생활에서 제약이 따를 것이라는 이기적인 우려가 더 큰 관심을 끌도록 진행되는 후속절차는 결국 가해자에 대한 경미한 처벌로 귀결되면서 피해자에게 3차 가해가 이루어진다. 가해자의 안도감 뒤에서 피해자의 억장은 무너진다. 어떤 폭력에서든 피해자 또는 신고자의 안전을 가장 우선하는 보호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자 보호가 미흡해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피해자 보호 의무기관에 대해서도 강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상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의 의향이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피해자가 숨고 가해자가 큰소리치는 ‘거꾸로 된 세상’은 ‘내가 누군지 알아’에 맞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 권력형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2020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N번방 성착취’ 사건은 주범 조주빈이 징역 42년을 확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범죄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경제적 이익을 노리고 저질러진 범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무거운 형량뿐만 아니라 범죄수익의 철저한 환수도 처벌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안전에 대한 위협은 재난, 참사, 폭력, 전쟁으로부터만 발생하지 않는다. 빈곤에서 벗어나는 경제적 안전 역시 개인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이 경제적 안전은 대내적인 측면과 대외적인 측면을 가진다. 대내적으로는 적정한 소득과 자산이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국민 모두의 경제적 안전이 시장을 통해서 보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인 일자리가 시장에서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데에는 갈수록 한계가 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헌법 제32조 ①항) 한다. 한마디로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 ‘안전망의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 굳이 따진다면 선 일자리, 후 안전망이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수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자리 없는 성장’을 확인하면서 우려했던 이유도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2021∼2022년 산업연관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취업유발계수는 전년(8.7명) 대비 0.6명 감소한 8.1명으로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취업유발계수는 2000년 25.7명을 정점으로 매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한국경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자동화가 급진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앞으로 AI마저 생산에 도입되기 시작하면 취업유발계수가 낮아지는 추세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민주당이 대선공약으로 발표한 ‘기본사회’ 구상은 시장 및 사회와 국가의 접점을 최대한 넓힌다는 점에서 서구 복지국가 구상과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청년의 자산 형성과 사회 진입”을 위해 공약하고 있는 “청년미래적금”이 현실화되고, “생애소득 보장”을 위해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에 대한 국민의 지분 참여”가 실현되기 위해서 필요한 정기적인 수입이나 ‘종잣돈’의 출처는 상속이나 증여가 아니면 시장소득일 수밖에 없다. 결국 “기본사회”의 “생애주기별 소득보장체계”가 시장경제와 양립하면서 모든 국민에게 달성되려면 일자리 창출을 매개로 해야 지속가능하다.
경제적 안전의 대외적 측면이 경제안보이다. 미국 주도로 재편되고 있는 국제분업 질서에서 강화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의 열쇠말은 제조업 부흥이다. 국제분업질서의 재편에 더하여 AI혁명은 한국경제에 제조업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도전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AI의 경제적 활용으로 노동총량이 줄어드는 것은 경제법칙이다. AI 도입으로 사라질 일자리 명단이 수년 전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대한민국이 AI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지난 3년의 허송세월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투자와 인간 중심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AI 활용이 사람에게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노동시간 단축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총량의 감소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일자리 중심의 리쇼어링이 병행되어야 한다. 차기 정부는 ‘자유무역’ 환상을 깨뜨리고 서둘러 경제안보를 보강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실현과 제조업 기반 일자리의 성공적인 확충은 안전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필수구성요소이다.
 
김호균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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