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의 문화살롱]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이 땅에 쓴 '한편의 시'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전성민 기자
입력 2024-04-08 06: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의 미학

  • 반세기 걸친 대표작 500점

  • 우리 고유 지형 살리는데 노력

  • 건축 뒤에 가려졌던 분야 애석

  • 후학 길 터주려 전시 마음먹어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경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1941년생으로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은 시를 닮았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그의 조경은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이 특징이다.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식목일인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했다.
 
정영선이 지금도 땅에 쓰고 있는 ‘한 편의 시’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삶과 작업을 되짚어 보며,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 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반세기 동안 펼쳐 온 조경 활동을 총망라하는 전시다. 60여 개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가의 아카이브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되며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정영선 조경가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영선 조경가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영선은 반세기 동안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1961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 농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이 생기자 1회 신입생으로 등록했다. 뒤이어 1980년 국내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토개발기술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1987년 조경설계업체 서안을 설립했고, 지금까지 약 40년 동안 조경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2023년에는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조경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상인 제프리 젤리코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했다. 
 
정영선은 지난 4일 전시를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조경은 그저 건축 뒤에 있는 분야로만 알려져 왔다”며 “선배인 제가 조경을 주제로 전시해야 후학에 길이 마련되고, 우리 분야도 더 알려지겠다고 생각해 기꺼이 전시에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목월 시인과의 특별한 인연도 밝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도 좋아했는데,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 선생님은 오늘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그만큼 아껴주셨다. 새로운 시집이 나오면 제가 다니는 학교로 보내주셨다”며 “작품이 잘 안 풀릴 때는 박 선생님의 시를 읽는다”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다. 정영선은 50여 년의 조경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정영선의 작품 세계를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기념비적 조경과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재구성했다. 연대기적 서사를 지양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도 맥을 같이한다.
 
전시는 크게 7개로 나눴다.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조경의 사례를 살펴본다. 한국 최초의 근대 공원인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비움의 미’를 강조한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일제강점기 철길 중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체 자본으로 건설된 경춘선을 공원화한 ‘경춘선숲길’ (2015~2017) 등을 소개한다. 조경이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한 프로젝트들이다.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에서는 주요 국제 행사 개최와 더불어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화된 도시 경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사업을 다룬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엑스포’(1993) 등 한국의 경제, 문화, 기술적 도약의 기회였던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도 소개됐다.

정영선은 “우리나라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들어오게 된 계기가 특이하다”며 “엑스포와 같이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행사를 할 때 국가가 나서면서 조경이라는 분야가 커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은 경제 성장이 동반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수요가 생긴 가족단위 여가활동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정영선은 예술, 교육, 체육, 관광 등 각 문화기관과 레저시설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합문화 예술단지 ‘예술의전당’(1988)의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 스포츠 중심의 휴양 리조트 ‘휘닉스파크’(1995)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이 공개됐으며,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2025 예정)도 소개된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호암미술관 희원을 시작으로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과 한국 자생종 식물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경기도와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의 ‘해동경기원’(2005)도 만날 수 있다.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다룬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2007), ‘선유도공원’(2001), ‘파주출판단지’(2012·2014)를 통해 습지를 복원하고 하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이번 전시를 위한 새로운 정원이 조성됐다. 석산인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미술관 내·외부에 재현했다.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볼 수 있다.
 
한편, 배우 한예리가 오디오가이드에 목소리를 재능 기부했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대표작이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서 아름답게 숨 쉬고 있어 놀랐다”고 전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이 평생 일군 작품세계 중 엄선한 60여 개의 작업과 서울관에 특화된 2개의 신작 정원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라며, “그의 조경 작품에서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이 있기까지의 각고의 분투와 설득, 구현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9월 22일까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 조경가가 전시마당에 조성한 정원 [사진=국립현대미술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