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볼까 눈가려요"...욕설 현수막 난립에 지자체 '골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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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성 기자·권보경 기자
입력 2023-10-3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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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4시경 기자가 찾은 서울 중구 시청역 3번 출구 앞에 욕설이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권보경 기자
지난 27일 서울 중구 시청역 3번 출구 앞에 욕설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권보경 기자]
최근 가을철을 맞아 가족과 함께 고궁 산책에 나선 조모씨(48)는 덕수궁 돌담길 벽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초등학생 자녀 시선을 억지로 돌려야만 했다. 비방을 넘어 입에 담기 힘든 각종 욕설과 혐오가 가득한 내용이 곳곳에 걸려 있어서다. 조씨는 “근래 들어 시민단체들의 상대 진영을 향한 대자보 비방 수위가 너무 심해졌다. 어린 자녀들이나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중요해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이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한다면 어느 정도 제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자가 지난 27일 오후 찾은 서울시청과 덕수궁 일대 인근에는 "○○○ 닫고 있어야 당신 ○○들이 피눈물 흘리며 비참하게 살 것이다" "수많은 공무원 ○○들이 공범이다" "○○○해봐야 100년을 못 산다 ○○○○들아" 같은 자극적인 문구와 욕설이 적힌 현수막과 설치물들이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이날 경기 부천에서 나들이를 왔다는 50대 주부 김모씨도 "오랜만에 서울에 오니 이런 현수막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 자녀인 초등학교 6학년 이모군은 "'살인'이라는 표현이 보기가 싫고 무섭다"며 "기분이 불쾌하다"고 했다. 

최근 욕설·혐오 발언이 담긴 현수막 게시나 스피커 등을 동원한 집회로 일반 다수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해 개정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전국적으로 현수막 난립도 심화됐다.
 
일부 지자체가 조례를 통한 ‘현수막과의 전쟁’에 나섰지만 상위법 제·개정 없이는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전문가들은 국민 일반 다수의 기본권도 보장할 수 있도록 입법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당 현수막’ 철거 제동 건 행안부···“조례로는 한계”

31일 아주경제 취재에 따르면 광역자치단체에 이어 최근에는 기초자치단체에서도 자체 조례를 통한 정치 현수막 철거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상위법인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정당 정책이나 정치 현안 관련 현수막은 따로 신고하지 않아도 설치가 가능해졌다. 
 
송파구청은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최초로 다음 달부터 ‘혐오·정당 현수막’ 철거에 나설 예정이다. 구청은 지난 18일 관련 조례를 제정해 공포한 바 있다. 송파구에 이어 서울 서초구도 혐오·비방을 목적으로 한 현수막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긴 조례 개정안을 지난 17일 입법예고했다. 구청 관계자는 “조례 개정 심의를 통해 구 의회에 곧 상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방 광역자치단체들은 한발 앞서 현수막 철거에 나서고 있다. 인천시는 지난 5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조례를 개정해 조례 위반 정당 현수막을 강제로 철거 중이다. 이어 대구시와 부산시, 광주시 의회도 비슷한 내용으로 무분별한 현수막 난립을 규제하는 자체 조례를 제정해 철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지자체는 여전히 조례 개정을 망설이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지자체 의회에 '재의'를 요구하거나 법원에 조례 집행정지 신청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옥외광고물법에서 위임하지 않은 사항을 규정한 조례는 법규 위반이라는 게 행안부 유권해석이다. 

행안부는 다만 지난 5월부터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보호구역에 정당 현수막을 게시할 수 없도록 한 '정당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시행해 일정 규제에 나서고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여전히 옥외광고물법에 근거해 군소 정당 등이 다수 밀집 지역에 현수막을 게시하는 것이 가능해서다. 해당 가이드라인에는 민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방과 모욕, 욕설 등 내용에 대한 규제도 빠졌다.   

별도로 국회가 지난 8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서 현수막 등 설치 금지 기간을 기존 ‘선거일 전 180일’에서 ‘120일 전’으로 60일 단축한 점도 '현수막 공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 자치구 관계자는 “결국 상위법인 집시법이나 옥외광고물법 개정이 없이 조례 개정만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집회 시 혐오 표현’, 기본권 침해···“균형 맞춘 법 개정 필요”

행안부 유권해석과 관련해 인천시의회는 지난 7월 대법원에 옥외광고물법에 대한 위헌 여부를 확인해 달라며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새변)과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도 지난 8월 해당 법 8조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옥외광고물법 시행과 함께 일부 미성숙한 국내 집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시민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도 혐오 표현이나 비방·모욕 등으로 사생활 평온을 해칠 때에는 집회·시위를 금지하거나 제한을 통고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 3건을 발의했다. 그러나 관련 논의는 소위원회 단계에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한편, 정당 현수막 난립 방지를 골자로 한 옥외광고물법 일부 개정안은 이날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법조계는 옥외광고물법과 집시법 추가 개정을 통해 헌법상 행복추구권이나 인격권, 사생활 평온을 해칠 수 있는 집회·시위 방식이나 광고물에 대해 적정 수준에서 규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집회의 자유는 기본권 중에서도 상위 기본권으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면서도 “다만 심각한 혐오 발언 등은 특별한 법률적 근거를 가지고 제한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백대용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일반 국민들이 향유하는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이 더욱 폭넓게 보장돼야 하는 만큼 현행 집시법이나 옥외광고물법 역시 일반 국민 다수의 기본권과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하는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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