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神을 믿은 애국지사 김준엽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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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입력 2023-08-1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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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총장의 일대기를 더듬어보면 험난한 시기에 품위를 지키며 옳고 바른 길을 걸어간 안목과 실천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김준엽은 종교가 없는 무교(無敎)였지만 역사의 신(神)을 믿은 역사학자였다. 역사의 가르침을 의식하며 찾아간 길이 '마지막 광복군'이었다. 1985년 '눈물의 졸업식'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압박으로 고려대 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어느 누구도 역사의 심판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한 일갈(一喝)은 폭압적인 집권세력을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스승다운 스승을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교육자의 사표(師表)’였다.
1982년 6월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뒤를 이어 김준엽 교수가 9대 총장이 되었다. 그가 막상 총장을 맡고 보니 4년 임기를 채우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두환 세력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대를 상대로 진압봉, 대검, 소총 등을 동원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해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이었다. 학원 안정을 최우선으로 강경책으로 치닫는 군사정권 앞에서 그는 분노와 함께 한계를 느꼈다. 그는 아내에게 결코 비굴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문제 학생 자르라는 압력 거부한 총장

김 총장은 취임 직후 대학원장과 의논해 명예박사 학위는 고대 발전에 공헌이 큰 국내외 인사이든가 저명인사로서 한국과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 한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외무장관이나 동남아의 군 참모총장 등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라는 문교부의 요구를 세 번이나 거절했다. 총장 비서실에 상주하는 기관원의 출입도 막았다. 이래저래 문교부에 그를 미워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은 총학생회를 폐지하고 군사조직 같은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입학생을 정원보다 30% 더 뽑아 졸업시까지 탈락시키는 졸업정원제를 실시했다. 졸정제에는 학생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시켜 데모를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역사의 신은 불의(不義)한 군사정권을 돕지 않았다. 학생 숫자가 해마다 늘어나면서 민주화 항쟁을 주도한 ‘386세대’의 자원이 되었다. 졸정제가 불만 요인이 되어 시국 데모를 가열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김준엽 총장
                          김준엽 총장.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학도호군단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총학생회장을 선출했다. 문교부에서는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부활 운동의 주동자들을 자르라는 지시가 계속 내려왔다.
1984년 11월에는 민정당사 농성 사건에 관련돼 구속된 고대생들을 교육부가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김 총장은 재판을 지켜본 후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그때 조치하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교육부는 표적감사를 해 교직원 자녀에게 20% 가산점을 줘 특례입학을 시킨 것을 문제 삼았다. 문교부 장관이 사표를 내지 않으면 재단에 총장 승인취소 통고를 하겠다고 했다. 결국 김 총장은 특례 학생 25명을 제적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문교부장관은 25일 졸업식을 치르고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강요했다.
김 총장은 총장 임기 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가 해직교수들을 원래 소속대학으로 복직시키고,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정부가 승인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정당사 농성학생 111명의 제적도 저지시켰다.
1985년 2월 25일 졸정제 1기인 1981학번들의 졸업식이자 김 총장의 고별식이 열렸다. 김 총장은 16분 16초 동안 고별사(졸업식사)를 했다.
“대학은 현실 속에 있으면서 미래를 예비하는 이상적 존재이며 먼 과거로부터 인류가 축적해온 고귀한 문화유산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여 인류의 평화와 국민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앞날의 사회진보를 위한 담보입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현재의 문제해결을 위해 그 힘을 모두 소진할 수 없으며 현실의 정치를 위해 교육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한평생 역사학을 공부해온 본인으로서 확신하는 바는 세계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진리와 정의와 선을 마침내는 실현해나가는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서 역사적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역사의 심판을 모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졸업식사가 끝나자 “총장사퇴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이어졌다. 졸업식이 끝나자 수백 명 학생들이 김 총장을 따라가며 광복군 노래를 합창했다. 
고려대학교의 81, 82, 83학번들의 주도로 56학번부터 22학번까지 범교적(汎校的)으로 참여해 8월 25~31일을 김준엽 탄생 100주년 주간으로 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벌인다.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첫 총학생회장이던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3선 의원(영문 81)과 강전찬 김준엽기념사업 자문위원회 운영위원장(법학 81), 이진한 아세아문제연구원장(사학 82) 등이 주역이다. 8월 26일 오후 2~4시 인촌기념관에서 김총장의 일대기를 영상 합창 인터뷰 퍼포먼스로 꾸민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8월 25일~10월 28일 고려대 박물관에서는 '장정(長征) 시대의 스승'이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회가 펼쳐진다.   

‘눈물의 졸업식’ 81학번들의 김 총장 추모문화제
 
일제는 무모하게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패색(敗色)이 짙어져가던 1943년 10월 <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공포했다. 일본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도 ‘일본 천황을 위한 성전(聖戰)’에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중이던 김준엽은 범상치 않은 발상을 했다.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 전장에 배치되면 천황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황군을 탈출해 독립군에 가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김준엽은 차곡차곡 실행에 옮겨 나침반 지도 손목시계 등을 준비했다.
 
아연
  아연 출판부가 새로 펴낸 《장정》.  표지  가운데 사진은 광복군 시절의 김준엽.

1944년 3월 29일 새벽 3시에 일군 부대를 탈주한 김준엽은 10개월 만에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가득찬 김준엽의 《장정》은 젊은이들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그는 광복군에서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독수리 작전의 공작원으로 선발돼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국에 침투해 일본군 부대를 교란하는 독수리 작전의 D-데이는 1945년 8월 20일. 그 사이에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맞고 닷새 전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이 작전이 무산된 것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하고, 광복군이 연합국의 전투에 참전하지 못함으로써 38도선 분할 등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에 발언권이 없었다.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김준엽은 중국에 남아 공부를 하면서 정관계에는 들어가지 않고 일생 학자와 교육자로 나라에 이바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이 신조를 평생 지켰다. 그는 1946년 2월 충칭의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에 국어과 전임강사를 하며 중국사와 중국어를 공부했다. 1949년 2월 귀국해 9월 고려대 부교수로 부임한 후 39년 동안 고려대를 떠나지 않았다. 1974년 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제의를 사양했다. 1987년 민주화가 된 뒤 김영삼 김대중 양김 진영으로부터 집권 후 국무총리를 시켜줄 테니 선거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뿌리쳤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의 국무총리직 제의도 거절했다.

장관 국무총리 제의 거절한 ‘교육자의 사표’

1958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 엔칭 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인연을 살려 미국 포드재단으로부터 거금을 지원받아 고려대에 아세아연구원(아연)을 설립했다. 북한자료와 구한국 외교문서를 정리해 활자화하는 작업을 주도한 곳이 아연이다. 지금 아연 산하에는 중국, 일본, 아세안 등 지역별 연구센터가 11개 있다.
1950, 1960년대에는 지식인 사회의 필독서였던 월간 《사상계》 주간을 맡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사상계의 발행인은 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한 장준하였다.
총장으로서 학교 빚을 갚고 재정을 탄탄히 하는 실적을 남겼다. 김 총장은 시설 확충을 위해 스스로를 ‘큰 거지’라고 부르며 대기업 회장들을 만나고 다녔다. 학교 부채를 줄이기 위해 교수들 회식비도 깎았다. 공과대 이과대 농과대에 투자를 늘려 인문계 중심의 학교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눈물의 졸업식을 기억하는 81학번들에게 김준엽은 영원한 고대 총장이다. 김 총장의 16분 16초 짜리 고별연설 파일이 80년대 학번들의 스마트폰에서 울려나온다. 고려대 교우들은 김준엽 탄생 100주년 행사를 통해 모금을 해서 아세아문제연구원에 김준엽 상설 전시홀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교우들 사이에서는 김 총장의 혜안과 땀이 서린 아세아문제연구원 앞에 동상을 세우는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학도병 1호 탈출자이고 마지막 광복군이며, 한국 교육사에 영원히 남을 총장의 사표. 미래 세대에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의 정신을 기리는 제자들의 노력이 활짝 꽃 피우기를 기원한다.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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