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90주년] 중국서 일본과 단독 전투, 마침내 쏘아올린 광복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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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기자
입력 2022-12-1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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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나이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 상해 의거 결심, 그리고 동반자 백범 김구

  • 윤 의사 폭탄 투척, 테러 아닌 광복전쟁

  • 윤 의사 상해의거에 중국인 조력자 주장은 날조

  • 중국과 우호 관계, 윤 의사 매개로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활로를 만든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올해 90주년을 맞이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장절 겸 전승을 축하하는 기념식에서 일제 침략 원흉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를 응징한 윤봉길 의사. 이후 윤봉길 의사는 일제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며 폭탄을 투척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투쟁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의 시기가 도래하면 조선은 물론 피식민지배민족이 독립할 것이다. 상급 군인 한두 명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리는 없다. 오직 기약하는 바는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조국 독립에 뜨거웠고, 죽음 앞에는 초연했던 윤봉길 의사. 위 심문조서가 증명하듯 윤봉길 의사는 일제 침략자들을 향한 무장 투쟁으로 독립운동 불씨를 횃불로 타오르게 했고, 대한민국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9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농민운동가, 노동운동가로 맹활약한 윤봉길 의사의 상해에서 순국까지의 삶을 1966년부터 기념사업에 참여해 지금까지 56년간 윤 의사 선양사업에 일평생을 바쳐온 친조카 윤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75)을 통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1930년 3월 6일에 ‘장부출가 생불환’이란 글을 남기고 윤 의사가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 독립군이 있는 줄 알고. 집을 떠날 때 가족한테도 말을 안 했다. ‘장부출가 생불환’이라며 사나이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간 것이다.”
 
훗날 그가 의거 2일 전 써서 김구에게 준 자서이력서에는 당시의 심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윤 의사가 조국 독립 열망을 품고 찾은 임시정부가 처한 현실은 달랐다. '임시정부는 존립 자체가 위태한 상황에 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제가 한·중 민족을 이간질할 목적으로 꾸민 만보산사건이 1931년 7월 2일 발생,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이 매우 높았다.

-독립군은커녕 월세조차 못 내던 임시정부
 
“윤 의사가 다음 해 5월 8일 상해에 도착했다. 이후 윤 의사가 임시정부와 그 주변을 한 2개월 살펴봤는데 임시정부가 유명무실했다. 임시정부가 교민단 하고 같은 사무실을 쓰는데 거기 교민들은 임시정부는 인정 안하고 그냥 교민단인 줄 알았다. 임시정부가 월세도 못 내고 봉급도 못 주고 형편없다. 1919년도에 임시정부가 3·1운동 때문에 생겼다. 그런데 지방색 다툼, 투쟁노선 갈등, 이념싸움 등으로 대부분의 임정 요인들이 임정을 떠났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실제 김구 하고 몇 사람만 남았다. 그러니까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유명무실 임시정부에 도미 계획한 윤 의사
 
“임시정부가 돈도 하나도 없고 조그만 방으로 쓰는데 월세도 못 내지 중국인 사람이 심부름 나서는데 봉급도 못 주지 실질 임시정부는 없었다. 명목만 남은 임시정부를 보니까 윤 의사는 임시정부를 한심해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도미계획은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5월에 상해를 갔는데 7월부터 미국에 갈 준비했다. 미국에 유학 가서 혁명사를 공부해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에. 그래서 윤 의사가 낮에는 모자공장(중국종품공사)에서 유학 경비를 마련하려고 취업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상해 영어학원에 다녔다. 윤 의사가 그 당시 집으로 편지 보낸 거 보면 그런 편지가 있다. 재미나게 끝에다가 어떤 건 한글로 봉길 후서 이렇게 쓰는데, 어떤 건 BK라고 이름을 영어 머리글자로 썼다. 영어 배웠다는 티를 낸 것이다. 그 편지도 지금 남아 있다.”
 
-상해 의거 결심, 그리고 동반자 백범 김구
 
“윤 의사와 김구와의 관계는 세간에 잘못 알려졌다. 세간에는 윤 의사가 김구의 지시대로 움직인 행동대장이나 혹은 암살 하수인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둘은 상해의거를 도모한 동반자 관계다. 윤 의사는 결심한 거사에 대한 뜻을 먼저 밝혔고 김구가 폭탄을 마련해 주고 배후에서 도운 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윤 의사가 중국종품공사에 근무할 때 김구가 몇 번 들러 공장에 근무하는 한인 공우들과 시국문제를 토론을 했을 뿐이다. 윤 의사는 임시정부 무력함에 실망해 김구와 특별한 교분을 쌓지 않았다. 당시 윤 의사는 한인공우친목회 회장이었다. 김구에 대해서도 윤 의사는 보통의 애국지사 정도로만 여겼다. 이후 후배 유진만의 집에 갔다가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준비해 준 사람이 김구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 김구와 관계가 형성됐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인물이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해 영국, 프랑스 등 세계 열강들의 이목이 상해로 집중되자 윤 의사는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혁명의 길로 나아간다. 일본군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인 거주지역인 홍구지역 내에 미분류상을 개점했다. 마침내 일본  교민신문 일일신문을 통해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윤봉길 의사는 김구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윤 의사 상해 의거, 결정적 광복 신호탄
 
“당시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열강들은 한반도를 일본 고유영토로 승인, 지도에 일본과 한반도를 같은 색으로 표현했다. 오천 년 우리 역사가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우리나라가 독립하리라고는 세계 어느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는 우리 역사를 새로 썼다.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활,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독립할 때까지 27년간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장제스 총통은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크게 감동, 이후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물심양면 지원했다. 또한 장 총통은 1943년 11월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끝내 독립 확약을 받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피식민지배국가 중 카이로회담에서 유일하게 독립이 보장된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이렇듯 상해의거는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 투혼과 결기를 세계 만방에 알려 끝내 조국광복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 사건이다.”
 
-윤 의사 폭탄 투척, 테러 아닌 광복 전쟁
 
“윤 의사 의거는 전투 행위다. 왜 테러라고 하느냐. 테러라는 얘기 들으면 아주 가슴이 아프다. 나는 윤 의사 의거를 광복 전쟁이라고 본다. 전투행위 겸 광복 전쟁이라고 그러는데 한인애국단의 성격은 임시정부 산하 특공대다. 일본에 이런 문서가 있다. 1932년 9월에 작성된 ‘상해 천장절 폭탄흉변사건’이라는 문서다. 여기에 보면 홍구공원을 '전장', '전쟁터'라고 표기했고 ‘전쟁터인 홍구공원에서 적국 특공대원이 일본군 수뇌를 살해할 목적으로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라고 돼 있다. 그리고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윤봉길의 폭탄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공무상 죽은 게 아니라 전투지휘 중 사망한 것으로 봐서 전사 처리했다. 또 윤 의사를 상대 교전국 전투원으로 판단했다.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군인은 단심이다. 윤 의사는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돼 군형무소에 구금됐고 군부대 영내에서 총살로 형이 집행됐다. 군인은 총살형이다. 교수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상해 의거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전과를 거둔 ‘광복 전쟁’, ‘전투 행위’라고 생각한다.”
 
-윤 의사 상해의거에 중국인 조력자 주장은 날조
 
“상해의거에 중국인 ‘왕야치아오’와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인 이화림(본명 이춘실)이 가담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상해의거와 전혀 관련이 없다. 왕야치아오는 일종의 정치 건달이었다. 그 당시 상하이는 중국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못하고 정치 건달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날조된 주장의 핵심은 왕야치아오가 물통 시한폭탄을 궈치아오라는 사람에게 제조하게 만들었고 돈 4만원 하고 물통 시한폭탄을 자기 동생인 왕수치아오를 통해서 안창호한테 전달했다는 것이다. 즉, 윤 의사 상해의거를 왕야치아오 본인이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왕수치아오 회고록에 실린 내용이다. 이들은 윤 의사가 자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점을 이용해 상해의거에 관여한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 고증 없이 뭔가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처럼 발표하고 이를 옮기고 있다. 매우 우려스럽다.”
 
윤주 부회장은 해방 직후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암장 장소를 알려준 사람은 일본여승 ‘야마모도 료도’가 아니라 형무소 간수였던 일본군 ‘시게하라’라는 점도 바로잡아야 할 점으로 꼽았다.
 
-중국과 우호 관계, 윤 의사를 매개로
 
“중국 하고 잘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보다 중국에 수출을 더 많이 한다. 지금 일본하고 적으로 싸우면 안 된다. 일본하고 잘 지내야 한다. 중국이 윤 의사를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윤 의사가 매개체 되면 한·중 우호 관계 형성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매년 중국 상해의거 현장에서 거행하는 상해의거 한중합동 기념식의 격을 높여야 한다. 상해 총영사가 아니라 국회의장이나 국무총리 등이 참석해야 한다. 상해 총영사 하면 중국 홍구구장도 안 나오는 게 현실이다. 한·중합동 기념식의 격을 높여 윤 의사를 매개체로 우호 관계를 쌓으면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윤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글>

윤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는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청년들에게 남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듯이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국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동서양 역사에서 보건대 / 동양에는 문학가 맹자가 있고 / 서양에는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 미국에는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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