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8) 31년의 시공 초월한 베트남‧북한 남녀의 사랑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전 조선대교수
입력 2022-10-20 14:1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북한은 1945년 9월 2일 탄생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승인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 주석은 1945년 8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9월 2일 하노이의 정치·역사 중심지가 된 바딘 광장에서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였음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북한과 베트남은 1950년 1월 31일 수교하였고, 그해 10월 25일 상주 대사관을 교환 개설하였다. 외교 관계 수립 후에는 호찌민 주석과 김일성이 상호 교환 방문한 바 있으며, 베트남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자 북한은 현금 및 물자를 지원하고 베트남 유학생을 받아들여 인재를 육성해 줌으로써 상호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밀월 관계는 1978년 12월 북한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면서 잠시 대사를 소환하는 외교적인 냉각기도 있었지만 전통적인 우호 관계는 변함없이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북한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병력 203명을 파견하여 북한군 14명이 베트남에서 전사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호찌민 주석은 베트남의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해외로 유학을 보내 종전 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육성하였고, 그러한 계획하에 북한에도 베트남 유학생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팜응옥까인-리영희 부부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팜응옥까인 제공)]


북한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베트남 유학생들은 북조선과 베트남의 우호 관계 증진에 주축이 되었고,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자 북한 유학파들이 일부나마 한국 투자 유치 업무에 통역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몇몇은 베트남 대학에 처음으로 개설된 한국학과에 초창기 강사진으로 활동하였다. 평양 김책공업대학교 출신인 레당호안 교수(79)는 국립하노이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서 은퇴 후에도 한국문학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문학을 베트남에 가장 많이 소개하고 있는 현역 번역가다. 북한 유학생들의 통역 활동은 어휘와 억양이 북한 어투라서 다소 생소하기는 하였으나 한·베트남 외교 관계 수립 후 초창기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지 우수 학생을 해외로 파견하여 종전 후 국가 발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호찌민 주석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다. 많은 베트남 인재들이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권 여러 나라에 파견되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베트남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팜민찐 총리도 루마니아 유학생 출신이다.
북한 유학을 다녀온 학생 가운데 북한 여성과 애틋한 순애보도 있었음은 눈여겨볼 만하다. 주인공은 하노이 하동지역에 살고 있는 팜응옥까인(Phạm Ngọc Cảnh·73)씨와 리영희(74) 여사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한창 젊을 때인 20대에 만나 31년이 지난 50대가 되어서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팜응옥까인씨는 1967년에 북한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 18세 청년이었다. 화학을 전공한 그는 3학년 때인 1971년에 흥남시 소재 비료공장에 실습을 나갔는데 그 비료공장 실험실에 근무하는 리영희씨를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난관은 젊은 두 남녀가 돌파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북한에서 국제결혼을 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국제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팜응옥까인씨가 1973년 유학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다음부터는 베트남에서 북한으로 소식을 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1997년 응우옌마인껌 외교부 장관이 북한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팜응옥까인씨는 자신의 애절한 사연을 편지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북한 당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로부터 다시 5년 후인 2002년 5월 2일 쩐득르엉 국가주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에게 협조를 요청하여 북한 당국에서 결혼 허가를 받게 해 주었다. 팜응옥까인씨는 그해 10월 1일 단신으로 북한으로 날아가 꿈속에서 그리던 신부를 하노이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렸다. 감격의 날이었다.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해온 팜응옥까인씨 사연이 공개된 날이기도 하였다. 첫 만남 이후 31년 만에 이루어진 결혼식이었다! 신랑은 53세, 신부는 54였다. 신랑과 신부 모두 검은 머리가 반백이 되어서였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 여성과 베트남 남성 간 다문화가정 1호가 되었다. 북한 당국이 리영희씨에게 외국인과 혼인을 허락한다는 정식 문서를 발급함으로써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이들의 결혼이 극적으로 성사된 것이다. 

 

[팜응옥까인-리영희 부부의 현재 모습(사진=팜응옥까인 제공)]


하노이에서 2002년에 국제결혼식을 올린 두 부부는 올해로 결혼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엔지니어로 일했던 팜응옥까인씨가 퇴직한 뒤로는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트남 현지 언론에 따르면 리영희 여사는 "우리 사랑이 너무나 힘들게 이뤄졌기 때문에 생활이 어렵지만 극복할 수 있다. 남편은 잘생겼고, 처음 만날 때 우리 사랑이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 암담했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고 한다.
 
팜응옥까인씨와 리영희 여사의 시공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는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팜응옥까인씨와 리영희 여사는 마치 단테, 베르테르, 로미오가 사랑의 대상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처럼 사랑의 마법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들은 '마법에 걸린 사랑'에 빠져 깊은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거대한 자력(磁力)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팜응옥까인은 단테였고, 리영희는 베아트리체였다. ,
팜응옥까인은 베르테르, 리영희 로테였다.
팜응옥까인은 로미오, 리영희는 줄리엣이었다.
팜응옥까인은 이몽룡, 리영희는 춘향이었다.
팜응옥까인과 리영희는 거대한 자력의 주인공이었다.
 
필명 또흐우(Tố Hữu)로 널리 알려진 베트남의 저명한 시인이자 언어학자이며 정치가인 응우옌낌타인(Nguyễn Kim Thành)은 "인간과 인간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산다"고 했다. 결혼할 수는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못할지도 모르면서 31년간이나 서로를 기다리며 살아온 이들의 청춘을 누구도 되돌려 줄 수는 없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31년간이나 마음속으로만 사랑을 불태워 온 이들의 지고한 사랑이 안타까우면서도 우러러 보임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민족의 아픔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리라. 팜응옥까인과 리영희는 거대한 자력의 주인공이자 마법의 사랑에 빠진 21세기판 ‘이몽룡과 춘향’임이 분명하다.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