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칼럼] 中 근대사 속 한국 애국청년 김염과 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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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한중수교3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사무총장·단국대 교수
입력 2021-12-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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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상하이 1934'…예술의 전당 공연

  • 일제에 맞서 의기투합한 한중 청년들의 우정

  • 수교 30주년… 다시 생각해보는 한중관계

김진호 한중수교3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사무총장·단국대 교수

중국 근대사에서 신해혁명과 청조의 멸망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변화의 기회가 되었지만, 구미 제국주의 국가 침략과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은 결국 한국의 독립운동이 중국의 항일전쟁으로 연결되는 뜨거운 애국적 피의 결의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남북이 서로 나뉘었던 때도 아니기에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냉전의식으로 좌와 우를 나누는 단계는 아니었다.

즉,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미소 대립이 본격화되며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진영간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9년 중국대륙에서 사회주의 국가 건국, 남북의 개별 국가 건국과 대립,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분단된 국토의 이념적 대립이 강화됐고 이러한 잔영은 아직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동아시아에 사회주의 물결이 요동치고는 있었지만 그 시대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한국 독립운동이나 중국 항일전쟁의 큰 장애는 아니었다고 본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략을 향한 강한 경고였기에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새롭게 보는 기회가 됐다. 1910년 이후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따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중국을 거점으로 많이 진행됐다.

1931년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점령과 1937년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일어나면서 한국과 중국의 독립운동과 항일전쟁은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이루는 협력의 쾌거를 이뤄냈다. 제1,2차 아편전쟁으로 홍콩과 상하이 등 많은 항구와 도시를 개방한 중국에서 상하이는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전승절 행사를 하던 1932년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 현 노쉰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이 중국의 항일전쟁의 선봉의 위치에 서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비록, 중국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합작·내전, 그리고 한국내 정파 대립이 있었지만, 이것이 중국 대륙과 대만이 나뉘어 대치하고 남북한이 대립하고 도발하는 단계로 변화하는 것은 일본 패망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한국 독립운동에서 정파적 문제를 크게 대두시키는 것은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중국의 항일전쟁과 한국의 독립운동의 협력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며, 이 당시 한국인이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과 협력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상보다는 구국이 먼저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젊은 청년이 중국 본토에 들어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여러 영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자 중국의 항일운동을 도우며 영웅으로 활약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이중 곳곳에 아직 흔적이 남아있거나, 중국인이 기억하는 영웅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래도 대표적인 영웅을 꼽으라면 안중근·윤봉길 의사겠지만, 사실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의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鄭律成)이나 상하이에서 '영화의 신(神)'으로 기세를 떨친 김염(金焰)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얼빈에 가면 안중근 기념관을 보고, 상해 노쉰공원에 가면 윤봉길 선생을 기념한다. 하지만 현재 그냥 중국인으로 보일 수 있거나, 그렇게 선전되고 있는 정율성이나 김염이 한국인이고 이들이 그 많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항일영웅의 젊은 열혈 청년의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작곡가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1933년 형을 따라 중국 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1934년 졸업 후 비밀활동을 하면서 피아노를 배웠고 상하이에 가서 외국인에게 성악을 배운 후 1937년 프랑스에서 작곡 공부를 했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대합창’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1939년 창작되면서부터 5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불리워지고 있다. 이 곡은 훗날 중앙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군가’가 되었다.

영화배우 김염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양의사인 김필순(金弼淳)이다. 이듬해 아버지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9년 아버지가 일본 밀정에게 독살당한 뒤 가족과 헤어져 독립운동가인 고모 김순애(金淳愛: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의 집에 의탁해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927년 상하이로 가서 극장 매표원 등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중 1929년 쑨위(孫瑜) 감독에게 발탁돼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다. 여러 편 영화의 주연을 맡았는데, 특히 1932년 '야초한화(野草閑花)' 당시 최고의 여배우 롼링위(阮玲玉)와 출연하면서 최고 인기 배우로 자리잡았다. 그 뒤 1930년대 대표적 사실주의 영화로 꼽히는 항일영화 '대로(大路)'(1934)를 포함하여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당시 많은 중국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지난 11월 28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상하이 1934'은 바로 김염과 중국 국가를 작곡한 녜얼(聂耳)이 함께 일본에 맞서 구국운동을 펼치며 우정을 나눴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김염(백승렬 분), 녜얼 (안태준 분), 당시 영화감독 티엔한(김륜호 분)과 쑨위 (유기호 분)과 당시 암흑가의 황제 두웨성(백효성 분), 김염의 아내 메이(신서옥 분) 등이 등장한다. 역사적 고증을 거치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졌다.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중국 진출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뒀다. 원래는 지난해 예술의전당이 기획해 공연 일정까지 홈페이지에 공개되고 예매 직전 단계에까지 갔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기도 했다. 

극이 역사적 현실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영화 황제가 된 김염, 그리고 윈난성 출신으로 상하이로 건너와 분투하던 중국 열혈 애국청년 작곡가 녜얼의 만남을 주제로 스토리는 전개된다.

재밌는 점은 오늘날 녜얼이 영화 주제곡으로 작곡한 '의용군 진행곡'은 현재 중국 국가로 지정됐고,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 진행곡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열병에 반드시 등장하는 군가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춘(長春) 중국영화기념관에 가면 당시 중국 영화 황제였던 김염의 모습이 잘 전시돼 있다.

하얼빈, 창춘, 시안, 상하이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중국인들의 영혼에 붉을 밟히는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과 중국의 수교에서 서로 경제적 교류 외에도 서로 뜻을 같이 하며 밟은 미래를 꿈꾸던 시기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중국 영화를 보면 중국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과거 리안(李安) 감독의 영화 '색계(色戒)'를 보면 당시의 상하이와 윈난, 홍콩의 상황, 그리고 항일전쟁과 사상의 대립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든 '상하이 1934'를 이해하는데도 역사적 기초 지식이 필요하지 않나 해서 몇 자 적어보았다. 우리의 이웃인 중국과 우리의 관계에는 모순도 있지만, 공동의 빛을 향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중관계를 다시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음악극 '상하이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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