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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 '삶의 기억'] 마지막 '여자 광복군(光復軍)' 민영주 선생을 보내며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1-05-02 10:16
김준엽 고려대 전총장의 부인…그 뜨거운 날들의 기억을 품은 고요한 임종 앞에서



 

[독립운동가 민영주 선생 영면의 날인 지난달 30일, 문득 필자의 눈에 들어왔던 수레국화.]

 

[마지막 여자광복군 민영주선생.]

8.15에 태어난 사람··· 수레국화같은 한 송이 앞에 멈춰서다

선생 가신 날에 우연히 길가에서 수레국화를 보았습니다. 작지만 당차게 피어오른 푸른 꽃. 지상에서 두어뼘 솟아올라 꽃잎들을 얇게 펼쳐 스스로의 운명을 돌리려는 듯 하늘을 향해 수레바퀴를 흔들고 있는 꽃이었습니다. 꽃잎에 이가 빠져있는 자리엔 생의 전투 속에서 치열했던 고난의 기억들이 그 부재(不在)로 함께 돌아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수레국화는 프랑스에선 1차대전 전사(戰士)들을 기리는 현충(顯忠)의 꽃이고, 나폴레옹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갚아준 독일제국의 첫 황제 빌헬름 1세가 왕자 시절 숨어서 보았던 분노의 꽃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병사를 닮고 독일의 황실문장(紋章)에 새겨진 그 꽃을, 선생이 고요히 떠나신 날에 보게된 것이 우연 같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 시대 4월의 마지막날까지 숨쉬고 계셨던, 찬란한 수레국화의 충혼과 같은 마지막 여성 광복군이었습니다. 선생은, 광복절 딱 22년전인 1923년 8월15일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셨지요. 아버지는 임시정부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민필호(1898~1963)선생이셨고, 어머니는 신창희(1906~1990)여사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서 활약하시고 중국 신해혁명에도 가담했다가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며 단식으로 자진(自盡)한 신규식 선생(1879~1922,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따님이었지요. 태어난지 한 달 여만에, 외할아버지 신규식을 잃었던 것을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 가문 속에서 성장한 여장부

격렬하고 위태로운 독립운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태어난 선생은, 독립운동이 둥지였고 광복투쟁이 삶의 환경이었습니다. 두 살 위였던 오빠 민영수(1921~2011)는 상하이에서 학교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했고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해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945년에 광복군 OSS(미국 첩보국)훈련을 받고 이범석 지휘 아래 국내 공격작전을 준비하다가 뜻밖에 타력(他力)에 의한 해방을 맞았지요.(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오빠, 그리고 집안을 들락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자라난 선생이 어린 시절부터 다졌을 여장부(女丈夫)의 꿈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해봅니다.

선생은 1940년 9월17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 오빠와 함께 바로 입대를 하였지요. 2년 뒤인 1942년 1월에 임시정부 내무부 부원으로 파견됐고 충칭방송국에서 심리작전을 담당하는 전사(戰士)가 되었습니다. 1944년엔 한국독립당에 가입을 했지요. 이동녕, 안창호, 김구, 조소앙이 참여한 이 정당(1930년경 창당)은 민족주의 민주주의자들의 임시정부 기반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주석 판공실에서 서기로 해방 때까지 근무를 하였습니다.

1945년 오빠 민영수가 광복군 제2지대로 파견될 때 선생 또한 함께 배치되었습니다. 그해 4월 광복군 병력은 총 339명이었고 8월에는 7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총사령부와 3개 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습니다. 제1지대장은 이준식, 2지대장은 공진원, 3지대장은 김학규였지요. 오빠와 선생은 공진원 지대장 휘하에서 활동했습니다. 초기 여자광복군으로 지원한 사람은 선생을 비롯해,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신순호, 조순옥이었습니다. 여자광복군들은 사령부의 비서 업무와 선전사업을 담당했습니다. 선생은 이범석 참모장의 비서 겸 재무담당으로 광복군의 살림을 꾸렸지요.

광복군에서 만난, 학도병 출신 김준엽과 인연

독립운동가 김준엽(1920~2011)을 만난 것은 이때였습니다.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동양사학과 2학년 때 강제징집되어 학도병으로 끌려간 김준엽은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일본군 쓰가다 부대로 배치되었지요. 여기서 그는 일본인 상관으로부터 뺨을 맞고 크게 모욕을 느껴 탈영을 했는데, 같은 탈영병 장준하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들은 수천리를 걸어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갔습니다. 김준엽은 광복군에서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때 운명의 인연인 선생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해가 해방이 되는 1945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지요. 김준엽은 이후 내내, 처가의 독립운동 이력을 큰 긍지로 삼았지요.

김준엽은 해방 이후 중국 난징의 중앙대학에 머물렀다가 194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지요. 1951년 국립타이완대학에 유학했다가 1955년에 귀국해 1957년에 고려대에 아시아문제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이 연구소 내에는 공산권 연구실이 설치됐는데,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연구기관이었습니다. 김준엽이 공산주의 연구를 강조한 까닭은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아야 통일을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여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중국통이란 평판을 얻었지요.

그는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시절 여당 사무총장과 국토통일원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학자의 길을 가겠다면서 고사했습니다.
 

[광복군 출신이자 전 고려대 총장, 그리고 민영주 선생의 남편이었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 김준엽의 아름다운 기억들

1982년의 일입니다. 고려대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를 꾸벅했고, 직원에게 서류를 부탁했습니다. 서무과 직원이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총장 취임식이 있어서 저희가 정신이 없거든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노인은 "아, 그러시군요. 제가 그 총장 김준엽입니다."라고 말을 해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하지요. 그런 소탈한 면모의 남편이, 고려대 총장이 된 날이었지요.

전두환 정권 시절, 학교는 거의 전쟁터였습니다. 1983년 가을 무렵 고려대 학생들 수백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감그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밤이 깊어갈 때 대학총장 목소리가 확성기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이 있으면 내보내주세요.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말고 보내주세요. 학생 여러분들. 몸을 다치지 마십시오." 밖에서 밤을 지샌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였고, 다음날 아침 학생 500여명을 자진 철수시켜 무사히 귀가하게 했지요. 이 시위는 전두환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낸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두환 정부는 대학을 압박해 김준엽 총장을 쫓아냈지요. 1985년 2월 마지막 졸업식 축사. 그때 학생들은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지요. 신학기 개강 이후 총장 퇴진 반대 시위가 무섭게 일어났습니다. 김준엽은 이날의 풍경들을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로 꼽기도 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총리직을 제안받았을 때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 숙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습니다.

수레국화 꽃이 바람을 견디듯이

해방 이후 교육자 김준엽의 고요한 반려로 살아온 선생이기에, 이날에 문득 10년전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감회가 없을 수 없겠지요. 묵묵히 남편을 지키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던 그 생은 꼿꼿했던 김준엽의 삶에 대한 깊은 긍지와 자부심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또 평생의 '동지'로 살아온 남편에 대한 남다른 연대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수레국화 꽃이 바람을 견디듯이, 그 푸른 꽃잎처럼 굳세고 강인하게 그리고 가장 뜨겁게 살아낸 98년을 되돌아보며 회억(懷憶)하는 날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이 땅에서 한결같은 애국과 봉사의 삶을 일군 그 빛나는 수고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이상국 논설실장


▶ 민영주 선생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21년 4월30일 향년 98세로 별세한 선생은 5월2일 김준엽 전총장이 묻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김홍규씨가 있다. 
▶ 민영주 선생의 별세로, 생존 애국지사는 21명(국내 18명, 국외 3명)만 남았다. 특히 여성은 오희옥 지사만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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