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기습 폭설이 남긴 연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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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입력 2021-01-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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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지난 7일 저녁, 서울에는 폭설이 내렸다. 밤 10시께 학교를 출발,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평소 20분이면 가능한 거리다. 기습적인 폭설은 짧은 시간, 서울 전역을 눈으로 덮었다. 한파에다 눈 폭풍까지 겹친 퇴근길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2시간 넘는 밤길을 어떻게 운전해 집에 왔는지 한참동안 멍했다. 다음날 뉴스를 보면서 위안이 됐다. 수백m 거리를 3~4시간 걸렸다는 이들도 허다했다. 나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했다.

정신이 수습되자 지난밤 상황이 느리게 재생됐다. 처음 만난 이들 덕분에 늦게라도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걸음으로 가슴 졸이며 운전하다 한남대교를 건너자마자 문제가 터졌다. 경부고속도로 진입부에서 눈길에 갇혔다. 그렇게 가파른 길도 아닌데 차는 맥을 못 추었다. 이리저리 운전대를 꺾어도 공회전만 할뿐 당황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는 처지가 비슷한 차량이 2대 더 있었다. 5t 트럭과 고급 리무진 승용차였다.

두 운전자 모두 60대 가까웠다. 그들은 견인을 위해 레커차를 불렀다고 했다. 벌써 1시간 넘게 눈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전역이 난리 통이라 언제 도착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레커차 부르기를 포기하고 다시 운전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들은 내차를 밀어줬다. 10여분 분투 끝에 가까스로 눈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다급한 마음에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밤을 새워야 했을 것이다.

난장판,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생면부지 시민들은 한마음이 됐다. 자신도 어려운 처지임에도 처음 보는 이를 위해 힘을 보탰다. 어려운 이웃을 지나치지 않는 측은지심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 정치적 성향도, 신분도 뛰어넘었다. 5t 트럭, 고급 리무진 승용차는 평소라면 한데 어울리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판단되자 함께 팔을 걷었다. 아마 그들 중 누구는 보수, 누구는 진보로 정치성향이 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처럼 사람냄새를 느낀 뜻깊은 시간이었다. 우리 국민은 이렇듯 따뜻한 심성을 지닌 민족이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온통 갈등하며 지새웠다. 불공정이 판치고, 불평등이 심화된 탓이다. 국민 통합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정치는 제 기능을 못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악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누구도 공정을 믿지 않으며, 상대에 대한 불신은 깊게 패었다. 우리 사회에서 계층 갈등과 자산 불평등은 IMF 사태를 기점으로 한다.

돌이켜보면 IMF 사태 당시 우리 국민은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했다. IMF 사태라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가 됐다. 금모으기는 IMF 사태를 상징하는 대표적 장면이다. 돌 반지부터 신혼 예물까지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금붙이를 앞다퉈 내놓았다. 그 뒤 금값이 올랐지만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당연한 행동 정도로 여겼다. 숱한 전란 속에서 보여준 공동체 의식은 IMF 터널을 지나는데도 유감없이 큰 힘이 됐다.

지난 한 해 한국사회는 정치적 갈등이 심각했다. 여진은 새해도 계속되고 있다. 뜻 있는 국민들은 화합과 안정을 기대하고 있다. 1년 가까운 코로나19 국면에서 민생경제는 괴멸 직전에 놓였다.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벼랑 끝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정치는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라도 제시할 책임이 있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그런 온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새해벽두, 전직 대통령 사면을 놓고 갈등하고 있다.

국민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굳이 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 국민은 충분히 지쳐 있다. 바닥에 떨어진 민생위기 하나만으로도 버겁다. 전직 대통령 사면은 화합으로 가는 길이어야 한다.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통합보다는 갈등 조짐이 보인다. 우리 국민은 위기에 강하다. IMF 사태 때도 정치성향, 경제적 차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 목요일 폭설 때도 기꺼이 팔을 걷었다. 또 추위를 무릅쓰고 버스를 밀었다.

문재인 정부 5년 차다. 최근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다. 집권 5년 차 피로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국론 분열에 더 큰 실망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1년은 통합과 민생경제에서 성과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게 국민의 기대다. 정당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래도 무엇이 중한 일인지 우선순위는 있다. 지금처럼 의석수를 앞세운 더불어민주당 독주는 갈등과 증오를 부채질할 뿐이다.

국민의힘 또한 건전한 야당으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고질적인 발목잡기만 거듭한다면 도태를 피하기 어렵다. 야당은 여전히 대안세력으로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더는 희망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한밤중 한파를 무릅쓰고 모르는 사람의 차를 밀어주는 시민정신을 돌아본다.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정치만 정신 차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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