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민주화 시위] "더 잃을 것 없다"...코로나가 드러낸 태국 '흙수저'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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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현 기자
입력 2020-10-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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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가 국부의 67% 차지"...'레드불 3세·라마 10세'가 불 붙힌 청년층 설움

  • 양극사회, 250년 왕정의 결과...'앙시앵레짐'(구체제)이 발목잡은 미래전진

  • ''22년 만 최악' 2분기 성장률 -12.2%...사태 지속시 'GDP 0.5%' 추가 하락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참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시위는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을 위한 것입니다. 실업 사태와 낮은 성장률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자격이 있습니다."(시위 참가자 폰프롬 상카숙의 도이치벨레 인터뷰)

올 초 외신들이 태국의 반정부 집회를 '고분고분한'(docile) 분위기라고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민주화 시위 열기는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태국 반정부 시위 참가자 모습. [사진=EPA·연합뉴스]


지난 27일(현지시간)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은 이날 태국 의회가 반정부 시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이틀간의 특별 회기가 빈손으로 끝났다고 전했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와 여당은 '퇴진 불가' 입장에 변화가 없었다. 군주제 개혁은 아예 논의조차 불가능했다.

지난 18일 영국 BBC는 최근 3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태국의 반정부 시위가 태국 전역에서 세대간 갈등과 분열로 격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년 전 40대 이상의 도시 빈민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레드셔츠 운동과 달리 올해 사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10~30대의 청년층이 주도하고 있다. 방송은 이번 시위 사태 이유를 태국 청년들이 6년째에 접어든 군부 정권의 통치에 환멸을 느낀 데다 올해 코로나19 사태에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지난 7월 일가 자산이 6조원에 달하는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아가 8년 전 음주운전으로 낸 뺑소니 사망사고에서 50만 바트(약 1900만원)의 보석금을 지불한 후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되면서 유전무죄 논란을 일으킨 데다, 라마 10세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이 코로나19 봉쇄 중 첩 20명과 함께 독일에서 호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거 반정부 시위 사태는 태국 국왕의 지지 발언 한 마디로 종결했지만, 10~20대의 시위대는 군부 정권의 퇴진과 함께 자국의 군주 제도에 대한 개혁까지도 요구하고 있다.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 투쟁의 상징인 세 손가락 인사. [사진=EPA·연합뉴스]


◇'미래 전진' 발목 잡은 과거 정치...양극사회가 불러온 국가 경쟁력 역행

올해 시위 사태는 이미 작년 말부터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민간 정권 이양 약속'을 어긴 프라윳 군부정권은 작년 3월 5년 만에 총선을 실시했지만, 유명무실에 그치면서 시민들의 불만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미 쁘라윳 정권은 2017년 개정한 헌법을 통해 총리를 지명하는 양원의회 중 250명의 상원의원 전원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해 정권 교체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나마 쁘라윳 정권의 입김이 닿지 않았던 하원선거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원내 3당으로 급부상했던 팟아나콘마이(Future Forward Party, 미래전진당)가 지난 2월 태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하자 대학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래전진당이 군부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고 관료의 중립화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뿐 아니라 기업가 출신인 타나톤 중룽르앙낏 미래전진당 대표가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연상한다는 사실이 쁘라윳 총리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는 쁘라윳 정권이 10년 넘게 친탁(레드셔츠)과 반탁(옐로셔츠) 대립이 이어지며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하고 왕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집권한 탓이다.

기업가 출신인 탁신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2001년 출범한 탁신 정권이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분배·복지 정책'은 근 100년 동안 태국 왕실과 왕족, 군부, 경제 엘리트 등이 기득권을 독점해온 사회 구조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후 냉전체제에서 태국은 세계은행(WB)과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경제 성장에 성공했지만, 내수경제는 극도로 취약했다.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빈곤층이 공존하는 극심한 양극화 사회였기 때문이다.

250년 가까이 이어져온 왕정과 관료제는 수많은 왕족과 지역 유지들을 양산해냈고, 태국 왕실을 보위하는 군부는 날로 세를 키워갔다. 반면, 태국에는 2016년까지 상속세 제도(현 5% 세율)가 존재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동3권, 의료보험, 연금과 같은 기초적인 노동복지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
 

지난 2010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 시위 참가자 모습. [사진=EPA·연합뉴스]


지난해 기준 태국 기업 전체 지분의 36%가량이 단 500명에게 집중돼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으며, 과거 영국 가디언은 사설에서 태국을 두고 "가장 부유한 1%가 국부의 67%를 차지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탁신 정권의 복지 정책은 반대파에게는 국가 재정을 망친 포퓰리즘 정책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태국의 경제 상황에서 불가피한 정책이기도 했다. 특히, 1997년 5월 발생한 아시아 외환위기로 태국 국내경제가 초토화하자 탁신 총리는 도시 빈민과 최하층 농민 등의 가난한 계층을 지원해 내수경제를 확충하려 했다.

탁신 전 총리의 분배 정책은 농민과 서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자아냈고, 그 결과 친탁과 반탁으로 나뉜 태국 사회의 정치적 불안은 10년 넘게 지속했다. 문제는 2006년 탁신 전 총리의 영국 망명 이후에도 10년 동안이나 지속한 정치 불안 사태가 '동남아의 맹주' 태국의 국가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독일 국영 영어 방송인 도이체벨레(DW)는 지난 26일 태국의 시위 사태를 보도하면서 "그간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태국 경제의 생산 잠재력과 외국인 투자를 끌어내리면서 주변국보다 경제성장 속도도 느려졌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이 올해 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태국의 생산성은 1999~2007년까지 3.6% 떨어진 데 이어 2010~ 2016년에는 1.3%가 더 떨어졌다. GDP 대비 민간투자 비중 역시 1997년 30%에서 2018년 15%로 반토막났다.

가레스 래서 캐피탈 이코노믹스 애널리스트는 DW에서 "프라윳 총리의 쿠데타 전까지 지속한 2013~2014년 시위 사태는 태국의 GDP 성장률을 1%P(포인트) 떨어뜨렸으며, 민간 투자도 여전히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면서 "올해 시위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면 태국의 GDP는 잠재적으로 0.5%P가 더 하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동남아에 공장을 세우려 하는 투자자라면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임금도 낮은 베트남을 선택할 것"이라면서 "주기적으로 정치 불안이 이어지고 노동자 임금도 더 비싼 태국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사진=EPA·연합뉴스]


◇"더 잃을 것도 없다"...코로나19 사태가 부른 배수진

올해 코로나19 사태가 뒷걸음질하는 태국 경제에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 것도 시위 사태의 급진화에 영향을 줬다.

태국 국립경제사회개발위원회(NESDC)에 따르면, 태국의 경제성장률은 올 2분기 전년 동기 대비 -12.2%를 기록해 22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앞서 1분기에도 2011년 이후 가장 낮은 성장률인 -1.8% 역성장했다.

토사뽄 시리숨판 NESDC 사무총장은 "2분기 실적은 아시아 금융위기로 경제가 12.5%나 쪼그라든 1998년 2분기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후퇴"라면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5~-6%에서 -7.3~-7.8%로 하향 조정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7.1% 역성장을 예고한 상태다.

아울러 태국 경제의 자랑거리였던 1%대 실업률도 지난 7월에는 2.1%까지 치솟았다. 2분기 전체로는 1.95%를 기록해 지난 10년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태국 NESDC는 실업자 수가 지난 4월 400만명 수준에서 연말 1400만명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국가 실업률이 4% 이하인 경우 완전고용 상태로 해석하기에 태국의 실업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지만, 급격한 실업자 증가는 태국 사회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태국 경제의 10~20%를 차지하는 관광산업이 멈춰버린 타격이 컸다.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태국을 찾은 국제 관광객은 제로에 가까운데, 작년 같은 기간 동안에는 1850만명의 관광객이 태국을 방문했다.

래서 애널리스트는 "코로나19 사태로 태국의 관광산업이 완전히 추락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올해 시위 사태에서 다행인 지점"이라면서 "태국 경제가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태국 반정부 시위 참가자 모습. [사진=EPA·연합뉴스]

 

태국 경제성장률 추이. [그래픽=최주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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