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파르헤지아] 고교생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했던 이상한 말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10-26 08:32
이건희 회장 별세…'삼성가치를 일궈낸 별' 그를 돌아보며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전 회장과 소년시절 이건희. [사진= 삼성 제공]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기업가



한국 전후(戰後)70년은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 기적의 길이었다. 그 기적의 길에서 걸출했던 기업가 한 사람을 들라면 단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1942~2020, 10월25일 별세)이다. 한국 산업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정권의 지원에 힘입어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주창하며 이 땅의 주춧돌을 놓은 대기업 창업1세대가 가고, 그 '미션'을 이어받은 사람 중의 하나인 이 회장은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바꿔놓은 기업 리더십의 사표(師表)였다.

그는 경영의 문무(文武)를 선친(이병철)과 장인(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선친은 그에게 '무(武, 실행력)'의 스승이었다. "부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해 일을 직접 해보라고 주문했다.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했다. 경영이 이론이 아닌 실천이며 감(感)이란 것을 거기서 깨달았다." 문(文, 지혜·철학·비전)은 장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분은 기업경영과 정치, 경제, 법률, 행정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무엇이 진정한 극일(克日)이 무엇인가. 그 질문의 답을 보여준 사람은 이건희회장이다. 홍사덕 전 의원(지난 6월 별세)은 1950년대 그와 서울사대부고 동창이었다. 그는 당시의 기억 한 자락을 꺼낸 적이 있다. 청소년 이건희는 홍사덕에게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일본어를 배워두라고 말했다.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느냐고 묻자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소년은 과묵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상한 말을 가끔 했다. 이를테면,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다"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질 수 있다"는 따위의 '초(超)고교'스러운 말이었다. 일본어를 배우라고 말하던 그 소년은 결국 2006년 글로벌TV시장에서 최강 일본 소니를 제치고 삼성을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당시 일본의 잘 나가던 기업들과 지금의 삼성을 비교해보라. 일본을 이기는 건 구호가 아니고, 저 투철한 '준비'와 승부의식과 실천에서 나온다는 걸 그는 평생의 길로 보여준 셈이다. 

이건희 회장을 보는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다면적인 게 사실이다. 관점이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가 경영한 기업이 지닌 본질적 빛과 그늘일 수도 있다. 이 땅의 대기업들은 탄생 환경이 독재적 권력의 산업화 의지에서 형성되었던 것인 만큼 정치적 특혜를 누린 원죄를 부인할 수 없는 데다, 그렇게 이룬 기업 기반을 물려받은 사람에 대한 부드럽지 않은 관점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 기업가가 그의 역량과 비전과 소신으로 삼성이란 국가 대표의 기업을 환골탈태시킨 '성과'와 가치는 분명히 인정받아야 한다. 

초일류와 신경영의 삼성신화 창조자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오른 그는 취임 일성으로 "도전적인 경영으로 90년대까지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힌다. 얼핏 들으면 상투적인 수사(修辭)로 들렸을 이 말은 한국의 기업들을 혁신의 궤도에 올리는 선언이었다. 낯설게 들렸던 '초일류'는 이후 지금까지 기업의 화두가 됐다.

그의 초일류 도약의 핵심은 당시 이병철 회장과 삼성 내부의 신중론을 무릅쓰고 도전한 '반도체'다. 그는 1974년 사재를 출연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다. 오일쇼크로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가운데, 첨단산업에 대담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신념에서였다. 14년 만인 1988년 반도체사업은 흑자로 돌아섰고, 삼성전자 연매출은 최초로 3조원을 넘었다. 회장 취임 1년 만에 보여준 성과로, 반도체는 '이건희사업'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20년 2분기 기준으로 세계 D램시장의 42.1%, 낸드시장의 33.8%를 점유해 1위다. 두쪽 다 2위와의 격차가 10% 포인트 이상이다. 

그의 경영적 선택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은 1993년이었다. 미국의 어느 가전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구석진 자리에 놓인 것을 보고, 그는 이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충격타를 날리기로 했다.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삼성 경영진들이 모였다. 이날 쏟아진 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했다.

"뛸 사람은 뛰어라.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6개월 밤을 새워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삼성은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다.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집단이다. 과장에서 부장까지는 5시에 모두 사무실을 나가세요. 이건 명령이오."

폭풍 같은 이 말들로 구성된 '신경영' 선언은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을 던진다.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제가 시행됐다. "불량 삼성폰은 모두 불 태우시오." 회장의 이 단호한 명령에 수억원어치의 휴대폰을 쌓아놓고 불을 붙인 '애니콜 화형식'이 벌어졌다. 창업주가 이뤄놓은 기업기반을 탈바꿈하는 그의 결단은 삼성을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끌어올리는 전기(轉機)를 만들었다. 이후 삼성이 내외 여건에 따른 여러 가지 위기를 겪으면서도 급성장을 이어온 것은 '이건희 정신'이 중대한 기폭제가 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복합위기 타개 과제 남기고

그가 일으킨 경영혁신의 핵심은 '품질경영'이었다. 제품경쟁력을 강조한 그는 스마트폰과 가전, TV 등에서도 삼성을 글로벌 1위로 끌어올린다. 2009년 삼성 지펠냉장고 폭발사고와 2016년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건희의 부재'를 떠올렸다. 이후 6년여 '와병(臥病)의 부재' 기간은 이재용 부회장에겐 혁신경영 역량을 검증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 시대의 혁신가'와 결별한 삼성이 향후 선대의 품질경영을 어떻게 고도화하고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 나갈지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경영'이란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임기응변의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예측하고 그 시나리오에 따라 경영의 유연하고 신속한 결정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장변화가 격심할수록 이런 경영방식은 유효했다. 위기에 강한 삼성 체질을 만들어낸 셈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에는 이런 바탕이 있었다. 삼성은 지금도 내외적으로 복합위기를 맞고 있다. 기업 내부의 모순(기업지배 구조와 그룹 승계문제)이 부른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순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는 것이 삼성에는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한편 이 회장의 흑역사로 꼽히는 사업은 삼성자동차일 것이다. 취임 초기인 1987년 비서실에 자동차사업 진출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기아차 인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력을 맺고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한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환경과 비효율적 투자구조로 허우적거리다가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가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던 건 미국 유학시절의 꿈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그는 자동차에 빠져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고, 직접 자동차를 분해하며 내부 구조를 스스로 연구했다. 그는 수많은 희귀 외제자동차를 소장하는 수집광이었다. 그의 경영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그의 어린 시절 야심과 끼를 실현하는 끝없는 도전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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