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어젠다]<1>"이게 나라냐"란 말 왜 정권마다 나오나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07-20 17:58
세계선도국가로 뛰어오르자 ​- 비슷한 물 갈아봤자 大魚 안나온다 최진석교수 "산업혁명 이래 최대 호기…판을 바꿔 선도국 가자"
[아주경제 '국론(國論) 시리즈'를 열며]

권력교체가 좋은 나라 만든다는 건 환상


지난 정권 때 탄핵의 소용돌이에까지 이르게 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게 나라냐?"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촛불을 들며 제기한 이 질문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마음을 파고 들었습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에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나라'를 광장에 소환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지켜야 할 원칙과 가치, 품격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환기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라를 오작동하게 하는 권력행위들과 리더십에 대한 심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을 가장 빨리 깨닫고 가장 늦게까지 외치는 이가 시민이며 국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습니다.

나라의 원칙과 가치, 품격과 역할이 흔들릴 때, "나라는 무엇이냐"라는 환원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의 문제점을 나름으로 극복하여 현재의 정부를 시작했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라의 진로를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고 나라의 방향과 비전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그때의 판단이나 결정이 순간의 착시였을까요. 그 방향 선회에 심각한 잘못이 있었을까요. 지금 생겨난 오류가, 과연 그때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권력 교체만 하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오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이 상황은 숙고(熟考)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책임을 떠넘길 누군가가 아니라 이 문제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숙고만이 양식(良識)을 가능하게 합니다. 현재의 갈등 구조에서 권력이 다시 교체된다 해도 '기대하는 좋은 나라'가 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정부의 문제를 격렬하게 지적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진짜 나라'가 없고, 오로지 현재의 상대를 궤멸시켜 그 정치공백 속에 도로 들어앉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뀐 상황에서, 옛날생각으로 정치

그때 '나라'를 바꾼 시민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결정'을 실천해야 하는 이들이 나라를 제대로 운용하라는 민의를 살리지 못하고, 오래전에 유통기한이 끝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에 그 기회를 거침없이 쓴 것에 중대한 잘못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의도나 취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달라진 시대환경과 세계변화, 기술진보와 인식전환과 같은 흐름을 읽지 못하고 비교적 협소한 세계관과 정책적 안목을 고집했기에 의도와 취지 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급변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면서 구태의연한 싸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점이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지금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런 태도 이상의 식견과 역량을 지녔을까요? 이 나라의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나라냐'고 묻는 거듭된 질문의 의미는 같은 판에서 지지고 볶는 싸움판을 벌이면서 한 걸음도 제대로 진전하지 못하는 '판의 한계'에 있습니다. 비슷한 물을 갈아치운다고 대어(大魚)가 뛰어놀겠습니까.

코로나19 사태 이후, 언택팅 인류의 '신르네상스'를 열자는 얘기들이 나오지만, 그것은 새로운 판에 우리가 들어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K-방역이라는, 거의 최초의 '세계 선도(先導)' 경험을 이참에 획기적으로 살리자는 논의 또한 우리가 기존 선진국이 보여온 창발적인 역량과 새로운 문명의 주도력을 지닐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창발성과 주도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수준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수준이 선도력을 지니는 단계에 있어야 가능한 얘깁니다. 그 수준은 지금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진영의 판에서 뛰어올라야 가능하고, 나라가 한 팀처럼 결집하고 국가적인 역량이 집중되어야 가능합니다. 삶의 수준 전반에 걸쳐 여유와 절제와 배려 같은 사회적 품격이 갖춰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판을 리셋해야, 나라가 바뀐다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는 어느 정권 어느 개인의 탁월한 역량으로 국력을 '횡재'하는(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생각 수준이 나라의 수준을 이루며 힘있게 비약(飛躍)하는 가운데 새로움을 창출해내는 나라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시급히 논의해야 하는 까닭은 정치 권력의 쟁패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정권의 정책이나 이념에 국가의 '미래'를 맡기지 않고, 지금의 소모적인 '판'을 아예 확 바꿔 세계 선도국으로 비약할 때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 초유의 변혁기를 맞아, 중진국 끝머리에 올라와 있는 우리로서는 그런 선도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 거의 모두가 겪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떤 선진국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역으로 주목을 받았던 기억은 우리의 자신감과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의미심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닌 디지털 문명의 주도력 또한, '판'을 리셋하는 국면에서 중대한 경험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판을 여느냐에 달렸습니다.
 

최진석 교수[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지난 16일 아주경제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서강대)를 본사로 모셔서 '지금 판을 바꿔라, 선진화(先進化) 호기를 맞았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본사 논설실 필진(이재호·황호택·곽재원·박승준·김낭기 고문, 이상국 논설실장, 이수완 논설위원)이 참여해 질의 토론 시간도 가졌습니다.

아주경제 논설실은 [코로나시대 대한민국 '국론(國論)' 어젠다 시리즈]를 주 2회 연재하고자 합니다. 통찰과 안목과 경륜을 갖춘 필진이 '탈진영' 시대를 열어갈 실천적 화두와 '코로나 이후 선도국가론' 담론을 핵심 어젠다로 제시할 것입니다. 논란의 한쪽 입장에서 두는 일방적 '훈수'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과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며 획기적인 정책 관점의 전환과 유연한 방향성 재설정의 논점들을 의제화하기 위한 값진 제언이 되고자 합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에서 방담을 나누는 최진석 교수(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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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진영' 새로운 어젠다로, 국론을 결집하라

다음은 최진석 교수의 강의 내용 요지.

"현재 한국의 정치사회 갈등과 교착상태는 우리 사유의 수준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생각의 수준 이상으로는 살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수준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던 소리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건국세력, 산업화세력은 당시 생각 수준으로 계속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민주화세력은 민주화 당시 생각 수준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각자의 이야기가 자신들에겐 굉장히 진실한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 '이야기'를 지키려한다. 자기 생각의 수준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하려는 시도 자체를 못한다. 갈등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온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군가 해놓은 생각 결과들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민주화도 우리가 만든 이론이 아니라 맑시즘, 마오이즘, 주체사상과 같은 외부에 이미 있던 다양한 것들을 수행한 것이다.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민주화의 끝은 어디인지 스스로 생각해본 것이 아니다.

선진국은 무엇인가. 선도력이 있으면 선진국이고 없으면 선진국이 아니다. 간단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도력을 발휘하는 국가가 아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좀 보여준 게 있다지만 지속적인 선도력을 지녔던 분야는 아직까지 없다. 문명의 단계에서 선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대표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건이다. 먼저 만든 물건을 가지고 돈 벌면 선도력이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다시 만들어서 벌면 선도력이 없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제도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에게만 있는 제도로 살면 선도력이 있는 것이다. 관료 제도, 교육 제도, 정치 제도 등이 모두 그대로 수입 이식된 것들이다. 더 높은 단계로는 생각이 있다. 독립적인 생각이 있으면 선도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외부에서 온 생각의 결과를 집행하며 살았지 스스로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우리가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민주화를 넘어서는 어젠다를 세우는 것이다. 이 어젠다를 실현하려는 세력이 새롭게 등장해야만 가능하다. 지금의 건국,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갈등을 넘어서려면 새로운 어젠다를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민주화세력은 과거의 성공기억을 넘어설 수 없고, 산업화세력도 과거의 성공기억을 넘어설 수 없다.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성공기억이다. 많은 갈등은 자기가 했던 성공기억을 진리화해서 그 진리를 수행한다는 의식 때문에 일어난다.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 양심에 대한 주관적 확신이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똑 같이 양심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꽉 차 있다. 양심의 소리라고 스스로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소리를 하는 상대방은 양심도 없는 악인이 된다. 싸움이 정치적 싸움이 아니라 존재적 투쟁이 되어버린다. 이 싸움이 치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이냐 아니냐의 싸움으로 깊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이것도 생각하는 능력이 배양되지 않은 것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갈등, 즉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대결 구도를 해소하기 위해 협치(協治)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상 그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협치가 아니다. 협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지적활동이다. 감성적 감각적 본능적 경향에 저항하며 그것들을 극복해야 가능한 활동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각자의 이념과 신념이 지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채 주관적 양심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협치는 직접적인 감각과 감성에 저항하며 상대방을 수용하는 것인데, 우리는 지적 활동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따라서 협치는 지금 우리 수준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협치를 말하는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수용하라는 폭력적 자세로 협치를 말하지,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는 수용적 자세로 협치를 말하지 않는다. 협치를 할 정도의 내면이 아직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다. 협치를 주장하는 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확장하려는 계산 속에서 나오는 말이지 자신의 이념을 상대방을 향해 활짝 열고 유연하게 하면서 새로운 무엇을 수립하려는 적극적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능하지도 않는 협치를 공언할 게 아니라,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고 그 어젠다에 힘을 결집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선진국에 대한 부정적 어감(語感)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산업화세력을 주축으로 한 선진화를 도모해본 경험이 있다. 민주화 세력들 눈에는 선진화가 폭력적 국가주의의 형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념적인 태도일 뿐이다. 선진화는 추격 국가에서 선도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며, 전술 국가에서 전략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종속 국가에서 창의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선도력이란 역량을 중심에 놓고 하는 말이다. 선도력을 지닌 국가는, 앞서 나아가며(선진), 방법을 직접 고안하며(전략),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창의).

우리가 해야할 도전은 인류역사에서 산업혁명 이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도전이다. 신생 독립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고 선진화까지 이룬 나라는 우리 앞에 사례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것 외에 지금 이 시대 다른 도전으로는 이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인식이다. 새 어젠다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선도 국가로 갈 수가 없다. 선도 국가라는 새로운 아젠다로 결집하여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에게 이보다 더 나은 삶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선례가 없는 비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산업혁명 이후 계속되어왔던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인류의 삶의 방식과 가치가 바뀌고,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고 있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4차산업혁명도 호기를 만들어준다. 공고했던 국가발전의 위계가 어수선해지고 모든 나라가 혼란과 혼선을 겪고 있다. 패러다임이 견고하게 유지된다면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지금은 패러다임이 깨지는 시기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마침 우리 국력은 역사상 가장 강한 때를 맞았다. 지금 우리 형편에서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이 무겁겠는가.

                                                          [정리 = 최윤재 논설실 인턴기자]
 

최진석 교수[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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