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22)] 그리스의 ‘Oxi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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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논설고문
입력 2020-06-0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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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숭호의 '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22)] 그리스 사람들, 외세의 침략에 “아니!!”라며 맞섰던 날

  • ‘전설의 기자’ 팔라치, “이 세 글자가 나치를 파멸시켰다!”

[지중해 오디세이 22. 그리스의 ‘Oxi day’]
그리스 사람들, 외세의 침략에 “아니!!”라며 맞섰던 날
‘전설의 기자’ 팔라치, “이 세 글자가 나치를 파멸시켰다!”
 

 



두 나라가 서로 가까우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수밖에 없나봅니다. 지중해를 대표하는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먼 옛날에는 문명이 앞선 그리스가 이탈리아 땅에 식민지를 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패망시킨 기원전 146년 이후에는 로마의 후손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힘들게 한 적이 많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여러 번 그리스를 침략, 지배한 것은 물론 파시즘이 발호하기 시작한 1922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땅에 살고 있던 그리스어 생활자들을 학살하기도 했는데, 살해된 사람들은 기원전 8세기 무렵 이곳에 식민지를 세웠던 그리스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지중해 동쪽 끝 카스텔로리조 섬은 그리스 영토이나 터키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는 무려 570㎞ 떨어졌지만 터키 영토와는 거리가 2㎞밖에 안 됩니다. 인구는 1만 명이 채 안 되고, 오래된 성당과 해변, 동굴 속 모든 것이 환상적인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는 ‘블루 케이브(Blue Cave)’ 같은 볼거리가 없지 않으나 워낙 작아서 돌아보는데 반나절이면 된다고 합니다. 1992년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우수 외국 영화상을 받은 영화 ‘지중해’ 덕분에 유명해진 이 섬을 찾는 관광객 중에는 드문드문 한국인도 끼어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섬에 파견된 이탈리아 군인들과 그리스 주민들이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이름이 카스텔로리조였던 이 섬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면서 메기스티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가 2차 대전 후 그리스 영토로 회복된 후에는 다시 카스텔로리조가 됐습니다.

영화에서, 이 섬에 상륙한 이탈리아 군인들을 가장 먼저 맞는 것은 “그리스는 이탈리아의 무덤”이라는 큼직한 낙서입니다. ‘침략자’ 이탈리아에 대한 주민들의 뿌리 깊은 원한을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이탈리아 군인에게 “네 조상은 그리스 사람이었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카스텔리조를 떠나 그리스 본토에 바짝 붙어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살펴봅니다. 기원전 776년에 최초의 올림픽이 열린 올림피아가 있는 곳이고,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 이타카, 아테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맹주였던 스파르타가 있던 곳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입니다. 언덕 많은 이곳에서 기념비 하나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1970년대 초반 어느 해 이탈리아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의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았던 기념비입니다.

그리스 국경일에 ‘Oxi day’가 있습니다. ‘Oxi(오히)’는 ‘아니’나, ‘안 돼’입니다. 매년 10월 28일인 이 날을 영미권에서는 ‘No day’라고 번역합니다. 한국어로는 ‘아니일’이 되겠네요. 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10월 28일 새벽 3시,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그리스 주재 자국 대사를 통해 그리스 지도자 메타크사스에게 이탈리아 육군의 그리스 진입 및 일부 지역 점령을 허용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메타크사스는 바로 “Oxi!”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리스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주먹 쥔 손을 하늘로 쳐들면서 “Oxi!!”, “Oxi!!”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북쪽 알바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무솔리니의 군대는 이날 새벽 5시30분 국경을 넘어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추축국(樞軸國)이던 이탈리아와 히틀러 독일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Oxi!!”를 외쳤던 그리스 국민 중 다수가 무장 저항운동(Resistance)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1942년부터 은신하고 있던 산이나 들판에서 10월 28일을 ‘아니일’로 기념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정부는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 ‘아니일’이 다가오면 그리스는 물론 세계 전역의 그리스 이민자 사회는 국기로 덮이고, 퍼레이드와 민속잔치 같은 행사가 열립니다. ‘Oxi’ 세 글자를 새긴 기념비와 기념탑도 여러 곳에 세워졌습니다.

한국의 기자들, 특히 젊은 기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언론인 명단이 있다면 최상위-어쩌면 1위-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을 ‘전설적’ 기자 팔라치는 1974년 키신저, 덩샤오핑, 호메이니 등 당대 세계를 움직이던 인물 인터뷰 모음집 <역사를 인터뷰하다(Interview with History)>를 내면서 서문에 이날 보았던 ‘Oxi’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렬한 소감을 적어놓았습니다.
 

오리아나 팔라치



“나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념비는 펠레폰네소스의 언덕 위에서 보았던 ‘아니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Oxi’ 세 글자였다. 나치 점령 하에서 파시즘에 항거한 그리스 사람들이 새겨 놓은 그 세 글자를 나치 지휘관들은 흰 도료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거의 마력적으로 햇빛과 비는 그 흰 도료를 벗겨버렸다. 그 세 글자는 완강하고, 필사적으로 지울 수 없게, 표면 위에 다시 나타났다. ‘아니!!’라는 말이 끝내 나치를 무너뜨렸다.”

“지배와 복종 대신 저항과 경쟁이 정치의 근간”이라는 팔라치의 믿음은 나중에 나온 그의 소설 <한 남자(A Man, 1979)>에서는 “포기하는 자는 사는 게 아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을 뿐(A man who gives in doesn't live, he survives.)”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나타납니다.

기자 팔라치의 위대함은 1960년대 중반 소련 공산주의에 저항하다 조국에서 쫓겨난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근래 가장 주목할 만한 기자로 누구를 꼽을 수 있는가? (생략) 바로 1969년에서 1972년까지 이탈리아 잡지 <에우로페오>에 당대 가장 저명한 정치가들과의 대담을 시리즈로 실었던 오리아나 팔라치다. 그 대담들은 대담 이상의 어떤 것, 말하자면 결투였다. 권력이 막강한 정치가들은 링 위에 케이오로 나둥그러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대등하지 않은 무기로 싸웠다는 사실-질문을 던진 쪽은 그들이 아니라 항상 그녀였으니까-을 깨달았다.” 쿤데라는 “기자란 아무에게나 어떤 주제에 관해서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지닌 자”라면서, 그 신성한 권리를 가장 잘 행사한 기자가 팔라치라고 말한 겁니다.

이탈리아 사람인 팔라치가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략에서 비롯된 ‘Oxi’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이야기는 쏙 빼고 나치 독일의 파시즘만 언급한 게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만 나치 독일이 그리스에서 저지른 만행이 훨씬 더 잔학했던 탓이라고 해석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리스 출신인 마리아 칼라스 전기와 나나 무스쿠리 자서전에는 나치 독일의 무도함은 여러 페이지에 묘사됐지만 이탈리아 군인들의 만행은 보이지 않는 게 그런 해석의 근거가 될 것 같습니다.

‘Oxi’ 기념비 앞에서 이탈리아 사람인 팔라치가 저렇게 숙연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불의와 독재, 탄압, 착취, 차별, 인명 경시 등의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팔라치의 성격은 팔라치 이상으로 저항적이던 그리스의 젊은 정치인을 만나면서 더 불타올랐습니다.

그 정치인은 알레코스 파나고울리스(1939~1976)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팔라치의 소설 <한 남자>의 주인공이지요. 민주화에 열망을 품은 시인이었던 파나고울리스는 1967년 ‘대령들의 반란’으로 그리스에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체포를 피해 키프로스로 도피했다가 이듬해 8월 군사정권을 이끌던 게오르기 파파도폴로스 대령을 암살하려고 그리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암살기도는 실패하고 파나고울리스는 체포돼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군사정권은 교도소에서도 그에게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미국과 유럽 등 국제사회는 군사정권에 압력을 가했고,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그는 군 형무소에서 탈출했다가 다시 잡힙니다. 고문은 더 심해졌고, 그는 또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운신이 힘든 독방에 갇힌 그는 성냥개비에 자기 피를 찍어 시를 쓰면서 버팁니다. 군사정권이 사면을 제안해도 거부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민주화를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대령들은 1973년 8월 그를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합니다. 그가 석방되던 날 그리스에 몰려온 세계 각국 취재진에는 팔라치도 있었습니다. 팔라치가 열 살 연상이었지만 둘은 만난 지 이틀 만에 사랑에 빠집니다. 팔라치는 자서전 격인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그와 나의 관계는 정치적 접촉이었고 지적 만남이기도 했다. 도덕적 선택이면서 정치적 선택이었다. 서로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고 모든 것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거나 맞닥뜨렸다. 그래서 우리 만남과 사랑은 아주 필연적이었고, 매우 복합적이었고, 마지막에는, 그토록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둘의 운명을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토록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쓴 것은 그리스 민주화 이후 국회에 진출했던 파나고울리스가 1976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국회에서 “군사정권에 직간접적으로 협조했던 사람들은 정치에서 물러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는데, 그가 지목한 사람들은 의회와 정부 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이 그를 ‘처리’할 거라는 소문이 점차 커지던 무렵 “미친 듯이 질주하던 자동차”가 그가 탄 차를 들이받아 전복시켰습니다. 중상을 당한 그는 곧 숨졌습니다.

<한 남자>는 파나고울리스의 삶과 신념, 인간의 가치, 저항의 의미가 기록된 전기적 소설입니다. 팔라치는 연인이 음모로 죽었다고 확신하면서 둘이 지낼 때 받은 협박 등 증거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둘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도 행간 여기저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5공 군사정권 초기 우연히 손에 들어온 <한 남자>를 읽던 기억이 납니다. 팔라치의 저항과 사랑과 그것을 담아낸 필력에 반했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한국의 국경일과 기념일 중에 어느 날이 그리스의 ‘Oxi day’와 가장 비슷할까라는 생각해봤습니다. 바깥의 적이 아니라 우리끼리 ‘Oxi’를 더 크게 더 자주 부르짖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군인들과 주민들은 곧 잘 지내게 됩니다. 비좁은 섬에서 싸울 일도 없었지만 섬 어디서나 보이는 멋지고 아름다운 지중해가 그 적의를 없애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은 해변과 산속과 마을에서 같이 먹고 자고 사랑하고 춤추고 놉니다. 우리도 지중해 같은 바다에 둘러싸였더라면 서로 덜 미워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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