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0)]부부 침실에 만리장성을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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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4-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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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51세까지만 범방(犯房)을 했습니다

[다석 류영모와 부인 김효정.]


왜 식사를 줄이는 동시에 해혼을 했을까

1941년 2월 18일 아침에 온 가족을 모아놓고 51세의 류영모는 아내 김효정과의 해혼(解婚)을 선언했다. 결혼(結婚·혼인을 맺음)을 하였으니 그것을 푸는 '해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해혼은 부부 간의 성생활을 끊는 것이었다.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을 푸는 것이다. 부부가 갈라서는 이혼과는 다른 개념이다. 최근 졸혼(卒婚)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결혼행위를 졸업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이혼이 지니고 있는 결별이나 불화(不和)와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누그러뜨리고자 함이며 별거를 미화하는 의미에 가깝다. 해혼은 별거가 아니라 동거를 하고 사랑을 하되 육체적인 결합만을 금욕하는 관계이다. 이 금욕이야말로 류영모가 주목한 점이다.

해혼을 선언한 날은 하루 한끼 식사를 선언한 다음 날이었다. 두 가지를 연이어 발표한 까닭은, 그 두 가지가 인간이 짐승으로 사는 욕망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식색(食色·식생활과 성생활)을 금욕 수준으로 절제함으로써 신을 향한 수행의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이 세상 최대 흥미와 관심은 식색입니다. 일체 문화활동의 노력하는 초점이 식색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식색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짐승입니다. 짐승은 고뇌도 없이 식색을 자유로이 충족하며 사는 목적이 오직 그것입니다. 부귀(富貴)란 말은 식색의 사회적 표현입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까닭은 오직 잘 먹고 잘 놀고자 함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다 채워진 것 같지만, 돌아보면 짐승에서 하나도 더 나아간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얼' 빠진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이 단순한 욕망에 미쳐 있는 것이라도 면해야 합니다."

진짜 이성관계는 하느님뿐이다

그날 류영모와 김효정 부부의 방 한가운데에 긴 책상이 놓여졌다. 방은 옛 두칸짜리 방으로, 폭이 2.4m 정도였고 길이는 4.6m쯤 되었다. 그 한복판에 책상 벽이 놓인 것이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류영모 부부에게는 아주 다른 의미가 되었다.

류영모는 남녀 사랑에서 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 이성(異性)은 하느님뿐이며 사람은 모두가 상대적으로 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이란 바로 상대성과 절대성이며 이것이 인간과 신의 진정한 '이성관계'라는 것이다.

"사람은 남녀의 맛이 아니라 남녀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남녀의 뜻은 신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이 신의 사랑에까지 도달할 때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천국까지 끌고 갈 순 없지만, 부부의 사랑을 천국의 사랑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류영모가 식색(食色)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은 북한산 아래서 은거생활을 시작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전원(田園)의 한적한 취향을 누리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5년의 궁신지화(窮神知化)였다. 신을 궁극적으로 깨달아 감으로써 인간과 만물이 생성·소멸하는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궁신지화는 육신이 지니고 있는 짐승의 성질(수성·獸性)을 놓고 얼의 나로 직진하는 정신의 조짐이기도 하다. 치열한 다섯 해의 산중 영성수행은 이 길을 찾아내고 있었던 셈이다. 식색을 끊자. 성령과 직면하는 일은 이것부터이다.

결핍 해소 뒤에도 계속되는 건 '가짜욕망'

그가 일일일식과 해혼을 잇따라 선언한 것은 강력한 수행의 단계로 진입하는 선언이었다. 식욕과 색욕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존재다. 잠깐의 절제는 할 수 있지만, 평생을 통틀어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유혹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류영모는 대체 왜 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들을 이토록 단호하게 끊고자 했을까.

뜻밖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해명해준다. 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지만, 쾌락이 완성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쾌락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지 그것을 넘어선 과욕이 아니다. 가짜 식욕과 색욕을 경계하라.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사와, 사랑으로 일어난 진정한 섹스 외에는 하지 말라. 빵 몇 조각, 물 몇 모금 정도의 욕구 충족이면 충분하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은 가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사라지면 육체적 쾌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욕망을 부리는가. 그때의 욕망은 쾌락의 형태를 바꿔서 지속하려는 행위다. 이 변태적 욕망은 본능적인 욕망과는 다르며,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류영모는 자신의 '단색(斷色)'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녀의 정사를 쾌락이라고 하지만 대개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도 51세까지 범방(犯房·성생활)을 했으나 이후엔 아주 끊었습니다. 아기 낳고 하던 일이 꼭 전생에 하던 일같이 생각됩니다. 물론 정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레프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의 금욕 수행 또한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톨스토이는 류영모보다 62년 위였기에 청년기에도 그의 저서를 접할 수 있었다. 21세 더 많은 간디의 자서전이 출간된 것은 1927년이었다. 늦어도 40대 때에는 그의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내와의 성교라도 사랑 없으면 간음

톨스토이는 젊을 때 여러 가지 성적 일탈을 범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결혼한 부부의 성교는 간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내일지라도 단순히 성욕의 만족을 위한 성교는 죄악이라는 생각에 일리가 있다. 인류를 존속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성교는 정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와의 성교라도 정신적인 사랑 없이, 또 시기를 무시한 채 육욕을 위해 행하는 것이라면 간음이라고 보는 게 옳다. 아기의 출생을 목적으로 정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이뤄지는 아내와의 성교만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뜻이다."

간디는 이렇게 생각했다. "결혼은 인생에서 자연스런 것이며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다. 결혼은 신성한 정화(淨化)의 의식이다. 결혼 이후 혼인생활을 유지하며 자제의 생활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이다."(간디의 '어록' 중에서)

37세에 간디는 금욕생활에 들어간다. 1906년의 일이었다. "최후의 결심을 할 때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나에게는 있어야 할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욕정을 어떻게 누를 것인가. 아내와 육체관계 없이 지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붙들어주는 신의 뜻을 믿고 이것을 시작했다. 그 맹세를 한 지 20년이 됐다. 56세가 된 지금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브라마차랴(금욕)를 지키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매 순간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영원한 경각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간디는 13세에 결혼해 37세에 금욕에 들어갔다. 25년간 성생활을 한 것이다. 류영모는 25세에 결혼해 51세에 해혼 선언을 했다. 성생활을 한 것은 27년간이었다. 류영모는 간디가 영원한 경각심으로 살았다고 고백한 그 대목에서 보다 투철한 실행을 위해 부부 안방 공간을 둘로 나누는 명시적인 금욕을 표방하지 않았을까.

'성욕'은 잘못된 말, 그것은 육욕일 뿐

류영모는 남녀의 교합에 대한 욕망을 '성욕(性欲)'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건 성욕이 아니라 육욕(肉慾), 색욕(色慾) 혹은 수욕(獸慾·짐승욕망)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性)은 신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천명(天命之謂性, 천명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을 가리킬 뿐이다. 세상의 음란한 행위나 마음에 쓰이는 '성'이라는 말은 그 신의 생명을 모독하고 있는 셈이다.

톨스토이는 서양사람들이 남녀가 어울려 파티를 여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차라리 동양처럼 '남녀 분별'을 지키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하기도 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여자에게 음욕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음욕을 품는 것이 실성(失性·신을 잃어버린 것)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얼'의 의지가 강한 사람은 금욕생활의 길을 걷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들·딸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들 의상과 자상은 40이 넘어서 결혼을 했고, 제자들 가운데 독신으로 산 사람은 없었다. 딸 월상도 결혼을 했다. 결혼식 때는 아버지 류영모가 직접 주례를 서기도 했다. 집안에서 혼인식을 했는데, 신랑·신부를 방안에 나란히 앉히고는 "오늘부터 두 사람이 손잡고 함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라고 간결한 성혼 선언을 했다. 이 엄격한 금욕주의자의 주례, 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다석 류영모]



다석어록 = 껍질로 사귀는 피상교(皮相交)가 무슨 사람사귐이냐

사람이 사귀는 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껍질만 서로 관계가 있는 피상교에 지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의 하나이다. 알고 싶은 것은 그 속의 속인데, 남의 속에 들어가서 보지 못할 때에는 피상교에 불과하다. 부부지간, 부자지간도 피상교이다. 서로 좋으면 껍질(낯짝)이 좋다고 칭찬을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생을 지나가는데 마침내 참나를 찾아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본래 하느님께서 내게 준 분량을 영글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서 범죄에 이른다면 독한 탄산가스와 같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너무 에누리해서 죄악만을 강조한다면 사랑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적이 있을 리 없다. 언제나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무서운 힘을 내놓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평등각(平等覺·평등한 이치를 깨달아 아는 이)이다. 하느님도 사랑이다. 아침·저녁으로 반성할 것은 '내가 남을 이용하려 하는가', '내가 남을 섬기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집사람을 더 부리려 하는가, 아니면 더 도우려 하는가.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몸이거나 집이거나 나라거나 남을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무조건 봉사하자는 것이 예수정신이다. 오늘의 급선무는 지금 씨알들의 가장 아픈 곳을 분명하게 말하는 데 있다. 지금 아픈 곳을 말해야 하는 이는 종교인이다. 그들 대부분이 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아픈 것을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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