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 독립만세운동 함성 100년전 팬데믹 뚫고 울려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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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아주경제 논설고문.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입력 2020-04-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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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고문 [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박승준의 지피지기(知彼知己)] 


1918년 10월 5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있다.

“10월 3일 필라델피아 시는 모든 학교와 교회, 극장, 당구장 등 모든 모임 장소를 폐쇄했다. 장의사들은 일이 밀려 어쩔 줄 몰라했으며, 장례식장들은 가격을 6배로 올렸다. 유족들이 시신을 땅에 묻기도 했다. 애리조나 주 투산 시 보건국은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공중장소에 나타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학교와 극장이 폐쇄된 뉴 멕시코 주 앨버커키 시에서 발행되는 한 지방신문은 ‘공포의 유령들이 어디서나 활보한다’고 썼다.”

2020년 3월 16일 뉴욕 타임스의 과학과 의학 분야 칼럼니스트 지나 콜라타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1918년의 스페인 플루와 무엇이 다른가’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인류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1918년의 플루 팬데믹은 전 세계에서 5000만명의 목숨을 뺏아갔다. 바이러스를 관찰할 수 있는 전자현미경도 발명되기 전이었고, 유전자의 구조도 모르던 시대였다. 미국에서는 50만명이 사망했고, 일본, 아르헨티나, 독일과 수십개 국가로 확산됐다 … 현재 100년 전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시애틀 시는 공립 학교를 폐쇄했다. 텍사스 주 오스틴 시는 ‘South by Southwest’ 페스티벌을 취소했다. 애플은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고, 뉴욕 시는 시민들을 격리시켰다. 코스트 코 판매대에서는 생수를 구경할 수 없다.…”

WHO(세계보건기구)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1948년 4월 7일 발족했다. WHO는 지난 2018년 12월 4일부터 6일까지 전 세계 40개 국가가 참여하는 글로벌 비상작전(Emergency Operation) 훈련을 실시했다. 100년 전인 1918년에 발생한 인플루엔자(Spanish Flu) 팬데믹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감염시키고, 수백만명을 사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 대응하는 시뮬레이션 훈련이었다고 WHO 웹페이지는 기록했다.

2014년 1월 24일 발행된 내셔널 지오그래픽스는 “5000만명을 사망하게 한 1918년의 플루 팬데믹은 중국에서 시작됐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한다”는 글을 실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스지는 “캐나다 메모리얼 대학의 역사학자 마크 험프리는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뺏아간 1918년의 스페인 플루가 당시 캐나다에서 1차 대전의 서부전선이던 영국과 프랑스에 투입된 9만6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로부터 시작됐다”고 썼다. “이 중국인 노동자들은 캐나다에서 유럽 서부전선에 투입될 때까지 출입문이 폐쇄된 열차칸에 실려 이동했다는 사실을 밝힌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다”는 것이 근거였다.

험프리는 “중국에 ‘winter sickeness(冬季病·겨울병)’이라는 이름의 폐렴증세 질병이 발생했으며, 1917년 말까지 만리장성을 따라 6주 만에 500㎞ 범위 내에 확산돼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주장했다. 중국 대륙의 중국인들이 캐나다를 거쳐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을 형성한 프랑스와 영국에 노동자로 투입됨으로써 세계적인 플루 팬데믹으로 발전했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스는 2011년 미 국립 ‘알러지와 감염병 연구소’(NIAID) 소속의 연구원 제프리 타우벤버거가 1918년 플루 팬데믹으로 사망한 32명의 부검 샘플을 확인한 결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럽 서부전선에 투입되기 전인 1918년 5월 11일 미 아이오와 미군 캠프 닷지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 샘플에서 스페인 독감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1N1 Virus)를 발견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겨주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1918년의 중국은 청나라가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일본 등 8개국이 분할 점령하는 반 식민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맞은 1918년의 스페인 플루 팬데믹에 대해 현대 중국의 관영 인터넷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미 캔자스 주의 군 캠프에서 시작돼 1918년 가을에서 1920년 봄까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당시 17억 인구 가운데 10억명을 감염시키고 2500만~1억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기록했다. “특히 스페인에서 800만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스페인 왕까지 감염돼 스페인 독감(西班牙流感)이라고 호칭했다”고 아울러 전했다. 바이두는 100년 전의 1918년 봄과, 1918년 가을, 1919년 겨울에서 1920년 봄까지 세 차례의 대규모 확산 파동이 있었으며, 중국의 경우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 기록이 있다고 전했다. 대만에서는 1918년 6월 지룽(基隆)에서 시작된 제1차 확산 때 특별한 사망률을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1918년 10월에서 12월 중순까지 지속된 제2차 확산 때 77만명이 감염돼 2만5394명이 사망한 기록이 있다고 전했다. 1919년 12월에 시작돼 1920년 2월말에 끝난 제3차 확산 때는 14만여명이 감염돼 1만9244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대륙의 경우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던 선바오(申報)라는 신문이 상하이 일원의 스페인 플루의 확산 시작을 보도한 기록은 있으나 사망자수에 관한 공식 기록이 없었다.

 

[마스크 쓴 일본 여학생] 




당시 대만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우, 영국계 캐나다인으로 1916년 11월부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하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가 1919년 4월에 미국 의사협회의 공식 학술지 JAMA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스페인 플루의 조선 확산 현황을 외부에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의 팬데믹 인플루엔자에 관한 고찰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이라는 논문을 통해 “1918년 한해 동안 조선의 감염자 숫자는 400만명에서 8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보고했다. 사망자 숫자에 관해서는 “강원도의 경우 1000명에 6.7명이 인플루엔자에 의한 폐렴증세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이런 사망률은 일본 총독부 당국이 발표한 1000명에 2.38명보다 훨씬 높은 수치”라고 지적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이런 논문을 쓴 사실은 대한의사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의사학(醫史學)’ 2007년 12월호에 서울대 수의과대학 양일석 전 교수와 천명선 교수가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함으로써 알려졌다.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논문을 발전시켜 인제대 의과대학 인문의학 연구소 김택중 소장은 2017년 12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이 발간한 ‘인문논총’(제74권 제1호)에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 소장은 이 논문에서 100년 전 스페인 플루가 조선에 확산된 비교적 정확한 데이터를 산출해냈다. 이 논문은 “식민지 조선에서 1918년 독감 유행이 처음 인지된 시기는 2차 만연시기였던 1918년 9월경”이라고 추정하고 “독감은 남만주 철도를 타고 한반도 북부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조선에서의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1919년 조선총독부가 공식 집계한 결과 독감 유행으로 식민지 조선의 1918년 당시 인구 1705만7032명 가운데 755만6693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14만527명이 사망해서 사망률 0.82%를 기록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논문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18년 11월 22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해 9월 1일부터 11월 11일까지 발생한 경성 종로경찰서 관내 독감 사망자 총수는 1163명이었고, 매일신보의 또다른 보도에 따르면 10월부터 11월 15일 사이에 발생한 경성 본정경찰서 관내 환자 수는 5만 2000여명에 이르렀다는 상황을 보면 총독부 통계연보의 독감 관련 데이터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목해야 할 점은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이 스페인 플루가 만연한 상황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매일신보 1918년 10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종로경찰서가 관내의 독감환자를 집계한 결과 일본인 환자는 2600명, 조선인 환자는 2만4000명이었고, 사망자 숫자는 일본인 10명에 조선인 138명이었다. “헌병경찰을 동원한 일본 총독부의 통치는 스페인 플루의 확산으로 경성에서도 매일 1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화장장이 부족해지자 노천에서 화장하는 상황이라는 ‘경성부사(京城府史)’의 묘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행정이 한계에 이르렀고, 헌병 경찰의 무능한 대처는 조선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를 자아내게 했을 여지가 충분했다”는 것이 논문의 결론이다. 또한 “조선 성종대에 국법으로 화장을 금지한 이래 400여년간 매장이 장례문화의 전부였던 조선인들에게 화장을 합법화한 일제의 조처는 조선인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3·1운동은 범세계적인 스페인 플루 팬데믹의 확산이 조선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인들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서울 집회와 5일장을 활용한 지방 집회를 확산시킨 운동이었다.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서 벌인 만세운동으로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제도가 한계에 부딪혀 보통 경찰제로 바꾸어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정도를 약화시킨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김택중 박사의 논문은 결론지었다. 총독부 경무총장 권한이었던 전염병 예방 시행규칙과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규칙’을 각 도시사에 위임하는 제도적 변화도 일어났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기록된 3·1운동은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자극해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했으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는 5월 4일에 일본의 랴오둥(遼東) 반도와 대만 점령에 항의하는 청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중국역사에 남은 5·4 운동이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100년 만에 다시 한반도와 중국에서 확산된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때문에 1919년 스페인 플루 팬데믹 상황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이 얼마나 위험한 집회였는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비장한 각오를 하고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는지 이제사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8 조선 항일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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