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뒷담화] 검사가 ‘꾸기’의 문자를 공개하자 기자들이 우수수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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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진 사회부 부장
입력 2020-01-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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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조국 전 장관의 5촌 조카인 조범동씨의 공판 날. 검찰은 이날 법정에서 느닷없이 ‘꾸기’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했다.

‘꾸기’는 정경심 교수가 남편인 조국 전 장관을 휴대전화에 저장할 때 사용한 호칭이다. 그러니까 ‘꾸기’의 문자메시지는 정 교수와 조 전 장관 사이에 오간 대화다.

5촌 조카 조씨는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상태. 따라서 ‘꾸기’의 문자는 이날 재판의 쟁점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그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실 문자의 내용도 별것이 없었다. 정 교수가 세금이 많이 나와서 대출을 받아야 될 것 같다고 걱정을 하자 조 전 장관이 ‘많이 나왔네’라고 다소 심드렁하게 답한 것이 전부다. 어느 보통의 부부 사이에서 오간 문자대화라고 해도 아무 이상할 것 없는 수준이다.

이날 함께 공개된 자산관리사 김경록씨와의 문자나 정 교수가 남편의 5촌 조카 조씨에게 보낸 문자까지 포함시킨다고 해도 사실 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정 교수는 김경록씨와 투자종목을 두고 논의를 하다 “남편하고 상의한 뒤 연락하겠다”고 하고 대화를 끝냈다. 조범동씨에게는 “우리 돈 잘 크고 있죠?”라고 물었다.

아무리 치밀하게 살핀다고 해도 ‘범죄의 흔적’을 찾을 수준은 아니다. 말 그대로 ‘사생활’인 셈.

하지만 검찰은 이 문자메시지에서 '해석'을 덧붙여 범죄의 증거라는 주장을 폈다. "정 교수는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모펀드에 투자”를 했고, 이를 "피고인(조범동씨)은 권력자의 자금이 투자되는 것”이자 일종의 “큰 기회”라고 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하고 상의하겠다”는 문자를 조 전 장관과 정 교수의 공모증거로, “세금이 많이 나왔다”를 함께 긴밀하게 의논한 증거로, “우리 돈 잘 크고 있죠”는 대여금이 아닌 투자의 증거로 본 셈이다.

이런 주장은 좀 당혹스럽다. 보통사람들이 ‘배우자와 의논한 뒤 연락하겠다’고 말할 때는 사실상 완곡한 거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거절은 하지만 여지를 남기고 싶을 때도 많이 쓴다. 

이를 ‘공모’와 ‘긴밀한 의논’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적잖이 황당스럽다. 검사들의 결혼생활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처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것은 언론의 반응이다.

이날 검사가 조 전 장관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하자마자 법정을 가득 메웠던 기자들은 우수수 일어났다. 사실 본격적인 공방은 ‘꾸기’ 문자가 공개된 이후에 벌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기의 문자메시지’를 제목으로 내건 기사들이 포털사이트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을 마치 친절한 해설인양 덧붙인 기사들은 대중의 ‘관음증’을 노리기라도 한 듯 자극적인 문구를 앞세워 퍼져나갔다. 

이날 법정에서 변호인은 “피고인(조범동씨)의 공소사실과는 관련 없는 내용”이라고 반발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재판부 역시 “배경설명은 그만하고 공소사실과 직접 관련있는 내용부터 말하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그 어떤 언론에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날 재판에서는 오로지 검사의 주장만 증거로 제출됐으며, 법정에서 꽤 유력한 유죄의 증거로 채택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재판은 증거를 가지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절차다. 검사는 이 절차에서 증거를 내놓고 유죄를 입증하는 사람이지 대중들 앞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수사는 유죄의 증거를 찾는 과정이지 피의자를 망신주는 절차가 아니다.

하지만 검사도, 기자도 그것을 망각한지 오래인 듯하다.
 

취재진에 둘러싸인 정경심 교수의 변호인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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