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청구서 압박하는 동맹국, 美에 할 말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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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9-11-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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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중·고교 시절을 보낸 군산에는 미 공군기지가 있다. 국내에 산재하는 여러 미 공군기지 가운데 제법 큰 규모다. 이곳 정문 앞에서는 21년째 집회가 열린다. 매주 수요일 열리다 최근 월 1회로 축소됐다. 1998년 5월부터 시작됐으니 놀랍다. ‘군산미군기지 우리 땅 찾기 시민모임’은 그동안 여러 가지 민감한 사안을 이슈화했다. 직도 사격장 폐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주권 회복까지 다양하다. 최근에는 생화학전 대응 실험 및 훈련 중단, 화학무기 폐기와 연구소 폐쇄를 주장했다.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한 지난한 싸움이다.

군산 미 공군기지 같은 땅을 공여구역(供與區域)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SOFA에 따라 미군 주둔을 위해 무상 제공한 땅이다. 전국적으론 93개소 242㎢(7322만평)에 달한다. 경기도가 87%로 가장 넓다. 공여구역은 약소국엔 슬픈 땅이다. 주권이 미치지 않기에 그렇다. 필리핀 클라크, 일본 오키나와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주권 국가는 깜깜하다. 사드나 화학무기를 들여오고, 토양을 오염시켜도 속수무책이다. 주변 사유지도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는다. 미군기지 주변 지역이 낙후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이다. 1953년 SOFA 체결 이후 줄곧 그렇게 믿어왔다. 그래서 공짜로 땅을 내주고 갖은 편의를 제공했다. 횡포와 범죄에도 관대하게 대처했다. 기름 찌꺼기를 무단 방류하고, 폐기물을 불법 매립해도 참았다. 심지어 한국 여성을 성폭행하고,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숨져도 분노를 눌렀다. 그런데 더 이상 동맹으로 부르기엔 임계점에 도달했다.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 때문이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은 정점에 있다. 트럼프는 동맹이란 가치를 돈으로 환산, 장사치를 자처하고 나섰다.

요구액은 터무니없다. 얼마나 우습게 알면 이럴까 싶다. 저잣거리 장사치도 이렇지는 않다. 그런데 미국 관리들은 악착같은 채권자일 뿐이다. 해리스 주한 대사가 보인 무례함은 묵과하기 어렵다. 그는 국회 이혜훈 정보위원장과의 면담에서 ‘파이브 빌리언(50억 달러‧6조원)'만 외쳤다. 2시간여 동안 스무 번 남짓 그랬다는 것이다. 미군 주둔은 우리의 필요뿐만 아니다. 자신들이 구상하는 동북아 전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냉전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인계철선이다. 중국, 러시아, 북한으로 이어지는 접점에서 한국은 린치핀(Linchpin) 역할을 해왔다. 한국이란 둑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곤란하다.

미국이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극구 반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 국무부 한국 담당 관료들은 한목소리로 지소미아를 유지하라고 으름장 놨다. 그만큼 한국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분담금 인상과 미군 철수까지 흘리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공갈이다. 미국은 한·일 군사정보 교류가 단절되면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불안을 우려하고 있다. 결국 지소미아는 한·일 문제이면서 자신들 이해가 걸린 문제다. 그래서 지소미아와 방위비 협상은 연관 지어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문제 해결은 당연시됐던 것들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소재·부품을 사다 쓰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체 기술개발보다 수입하는 게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대일 무역은 만성적인 적자구조였다. 한 해도 흑자였던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누적 적자만 6200억 달러에 달한다. 소재·부품·장비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한 결과다. 그러나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 변화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을 중심으로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국민들도 불매운동에 가세했다. 일본 여행도 자제하고 있다.

희망적인 수치가 나왔다. 올해 대 일본 무역수지 적자는 1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10월 말까지 대 일본 적자는 163억6600만 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206억1400만 달러)에 비하면 20.6% 줄었다. 반도체 부품·장비 수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또 자동차·의류·주류·전자제품 등 소비재 수입도 감소했다.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낳은 역설이다. 만일 위기가 없었다면 기술 격차는 지속됐을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제는 누구도 일본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도 이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주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다. 1953년 이후 우리는 미군 주둔과 미국에 의존하는 국방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하고, 미국이 씌워주는 핵우산에 만족해야 하는지 돌아볼 때다. 트럼프는 경제논리로 분담금을 더 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핵우산도 언제든 치울 수 있다. 사드 배치는 미국 요구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호된 경제 보복을 받았다. 동맹국이라면 이런 사정을 헤아리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거꾸로 턱없는 청구서를 내밀고 있으니 염치없는 짓이다.

한국 정부는 평택 미군기지 조성에 21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평택 미군기지 임대료와 공여구역 사용료를 요구하는 게 맞는다. 그들 논리대로라면 부자 나라 미국이 다른 나라 땅을 빌려 쓰는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하다. 또 분담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회계감사도 요구하자. 어쩌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은 올바른 한·미 관계 정립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주한 미군 철수 카드를 내민다면 우리는 핵무장으로 맞설 필요가 있다. 이제는 익숙한 것과 결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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