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지금·여기·당신] 김대중 납치사건과 ‘닥치고 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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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논설위원
입력 2019-08-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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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 오늘,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김대중(DJ)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박정희 장기독재,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상징이자 재야 거물 정치인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된 것이다.

그 실체적 진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은 없지만, 역사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DJ를 납치해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려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으로 미수에 그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당시 이 사건은 한·일관계에 큰 위기를 초래했다. 일본은 "주권 침해"라며 자기네 땅과 바다에서 납치극을 벌인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독재자가 자신의 정적을 해외에서 제거하려 했다고 판단한 미국 등 국제 여론도 한국에 크게 불리했다. 모두가 한국의 잘못이라 생각했고,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일본에서 납치된지 129시간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 풀려난 DJ가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사진=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


어찌할 도리가 없던 한국 정부는 결국 일본에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그해 11월 2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일본을 찾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 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굴욕적인 표현이 담겨 있었다.

한·일 경제전쟁 와중인 지금, 이 사건을 꺼낸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관(觀)을 되새기고 싶어서다. DJ는 생전 여러 차례 “나는 일본에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한국 정부의 만행을 은폐하는 데 동의했고, 납치 사건 이후 아예 일본에 오지 못하게 했던 일본과 그 정부를 DJ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2012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발간한 연구총서 1번 ‘김대중과 한일관계’(류상영·와다 하루키·이토 나리히코 공저)를 폈다. 김대중도서관장을 지낸 류상영 연세대 교수가 쓴 이 책의 2장 ‘김대중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전략’을 보면 일관된 DJ의 일본관을 읽을 수 있다. DJ가 우리에게 남긴 명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일본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DJ는 자신이 죽을 뻔한 사건 은폐의 공범이자 자신을 외면했던 일본을 다 같은 일본으로 보지 않았다. 현실주의와 민족주의, 정치와 경제 등 4개 차원으로 접근했다. ‘일본은 ○○다’라고 일반화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일본에 자신의 인식과 정치이념을 확산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일본 내 평화와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사회 및 정치사회 세력들과의 공동노력으로 구체화됐다. 많은 일본 내 평화세력은 그와 인식을 같이하면서도 한·일관계 및 양국 내에서 민주주의와 평화가 진전되도록 다각도의 노력을 경주했다.”

대통령이 된 DJ는 1998년 10월 8일 일본 국회 연설에서도 “저는 과거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닌 일본의 수많은 민주시민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 한·일관계가 해방 이후 가장 좋았다는 건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일본 우호세력과의 지속적인 연대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일본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고 혐오하는 ‘닥치고 반일’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인 관광객들을 쫓아내려 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인들을 보자. 지난달 서울 광장시장 한 육회집. 옆자리 젊은 일본인 커플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장면을 봤다. 한국의 맛집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을 향해 적의가 담긴 눈길을 주거나 시비를 거는 한국인 손님은 없었다. 그러나 서울 중구청장은 아마 이들을 위협했을 게다.

우리 손을 맞잡은 일본인들의 방한도 적지 않다. 한 매체에 따르면 지난 6일 경남 합천에서 열린 제74주기 원폭피해자 추도식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참석했다. 매년 참석해온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돕는 모임' 대표 이치바 준코 씨 등 17명이 올해도 왔다. 이치바 준코 씨는 “우리는 앞으로도 한국인 원폭 피해자 배상 문제를 해결했다는 일본 정부의 헛소리를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도 한국과 일본의 반핵단체들이 공동으로 히로시마 원폭 투하 74주기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정부에 아시아 전쟁 피해자를 향한 사죄와 핵 폐기 등을 촉구했다.

나아가 한·일 양국 시민단체들은 ‘반(反)아베’ 공동전선을 꾸리고 있다.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한국과 일본에 각각 있는데, 오는 15일 합동집회를 갖고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까지 항의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종교계도 함께 손잡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오는 11일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소속 목사 10여명과 함께 ‘한·일 공동 시국기도회’를 연다.

노동계도 있다. 일본 국영철도회사인 JR 산하 ‘국철지바동력차노조’는 지난 1일 ‘개헌·전쟁을 향한 아베 정권 타도! 대한국 수출 제한을 즉시 철폐하라!’는 성명을 냈다. 이 노조는 한국의 민주노총 등과 연대해 일본에서 개헌 반대 등의 집회를 열어왔다.

강조하는 대목에서 손을 쫙 펴는 DJ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상상한다. "여러분~! 일본에 아베 같은 나쁜 정치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일본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손잡고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갑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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