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책에서 책으로' ④] 하이에크, '알아서 해주겠다'는 사회주의의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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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논설고문
입력 2019-06-1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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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아서 해주겠다’는 사회주의의 치명적 자만

  • 인류는 ‘알아서 해오면서’ 발전과 번영 이뤘다

 

[노벨상을 받는 하이에크. 출처=미제스재단]


“지난 16일 영국 런던 북부 마르크스 묘지의 묘비가 공산주의 이념을 비판하는 붉은 페인트로 뒤덮였다. 누군가가 묘비 앞면에는 ‘볼셰비키 학살 기념비 1917~1953년 6,600만 명 사망’, 오른쪽 옆면에는 ‘증오의 교리’, 왼쪽 옆면에는 ‘빈곤의 이념’이라는 문구를 붉은 페인트로 크게 적어 놓았다. 이곳을 성지로 여기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추종자들을 비웃은 것이다.”

올 2월 18일 아침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을 때 30년 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서독 프라이부르크대학병원 병상에 누워있던 92세 노인을 떠올랐다. 그는 TV를 보던 장년의 아들이 “아버지,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라고 놀라 외치자 “거봐라, 내가 뭐라고 말했니”라고 담담히 말한 F.A 하이에크(1899~1992)다. 그 무렵 나는 그의 마지막 저서 <치명적 자만 Fatal Conceit>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은 장벽이 무너지기 꼭 1년 전에 나왔고, 장벽 붕괴 2년 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부터 1953년 스탈린 사망 때까지 6,600만 명을 학살한 소련 공산주의가 사라졌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하이에크는 20대 초반에는 당시 유행이던 사회주의에 빠져 있었으나 빈 대학에서 미제스의 강의를 듣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로 돌아선다. 1945년에 쓴 <노예에의 길 The Road To Serfdom>에서 “사회주의는 어떠한 정치적 배경에서든, 아무리 자선을 베풀고 의도가 좋아도 결말이 나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그는 스승이 그랬던 고처럼 일생동안 이 믿음을 지켜나갔다.

<치명적 자만>은 미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사회주의의 이념은 숭고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야만에서 구하려 한다면 사회주의를 논박해야만 한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그것을 그냥 제쳐놓을 수 없다.”

이 말에 이어 하이에크는 곧바로 '확장된 질서(Extended Order)’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주의를 기울여’ 논박한다.

‘확장된 질서’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가 확장된 것이다. 자생적 질서는 말 그대로 스스로 생겨난 질서다. 그것을 지킨 집단은 덜 굶주리게 됐고, 생명을 지킬 수 있었으며, 후손이 번성했다. 동굴인류는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는’ 이 질서를 따르게 되었고, 이 질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계약(질서)을 존중하는 상거래와 법, 그리고 시장, 즉 ‘확장된 질서’로 발전했다는 게 하이에크의 설명이다. 확장된 질서는 분업과 경쟁을 통한 협동이 생겨나게 한 질서다.

하이에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장된 질서에 의한 시장경제체제, 자본주의를 무시하고 확장된 질서에 비해서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인간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받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법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는 ‘치명적 자만’에서 출발한다. 누가 생산하고 누구에게 분배해야 하는 가를 권력자와 그 주변의 정책 입안자 몇 명이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기들의 이성으로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이 사회주의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 사회주의의 지배를 받는 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이미 굶주린 채 억압받고 있지 않는가?”라는 게 이 책을 쓸 때 그의 생각이었다.

하이에크 사상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애써온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의 하이에크 해설서 <하이에크-자유의 길>에 따르면 <치명적 자만>은 그가 1978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가 나중에 편집해서 출판한 것인데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주의는 치명적으로 기만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지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위선을 부리며 우리를 노예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나에게 <치명적 자만>은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번역서 문장이 너무 복잡해 번역자의 실력과 성의를 (감히) 의심하다가 영어로 된 걸 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어책은 더 읽기 힘들었다. 10여 쪽을 읽다가 다시 번역서로 돌아가 꾸역꾸역 읽어냈다.

하이에크의 책이 어려운 이유는 영국의 전기 작가인 니컬러스 웝숏이 쓴 <케인스와 하이에크>에 나온다. “경제가 어려우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스와 “민주주의 정부의 경제 개입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반박한 하이에크. 이 두 사람의 학문과 삶을 설명하면서 웝숏은 “하이에크는 케인스보다 인기가 없었다. '작가는 '연인과도 같은 자신의 글을 무자비하게 살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알 정도로 글을 잘 썼던 케인스와는 달리 하이에크의 문장이 어려운 것도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웝숏은 ‘꾸미는 문장으로 꾸며진 문장이 다시 꾸며주는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꾸미고 있어서’라는 식으로 하이에크 문장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래도 <치명적 자만>은 재미있고 유익했다. 하이에크는 역사, 철학, 생물학(진화론), 윤리학, 법학, 언어학, 종교 등에서도 많은 것을 빌려와 자신의 논거로 삼고, 그것들을 일관된 입장에서 설명한다. “학문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대학자, 대석학(大碩學)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구나”라는 찬탄을 자아내게 하고 새로운 눈뜸을 준다. 미제스의 <인간행동>에서 받은 느낌이 <치명적 자만>에서 더 크게 되살아난다. ‘큰 스승’에 ‘큰 제자’다.

1974년, 하이에크는 기이하게도 사회주의적 경제학자였던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1970년대는 케인스적 시각이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미제스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변방으로 밀려나 있을 때다. 이런 때에 하이에크에게 노벨상을 준 것이 사건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뮈르달은 잊혔고, 하이에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구글에서 뮈르달로는 947,000개가 검색되지만 하이에크는 7,970,000개가 검색된다. 1973년 하이에크에 앞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레온티에프의 검색 결과도 734,000개에 불과하다.

미제스처럼 하이에크도 지식인들의 많은 ‘통념’을 깨트리고 있다. 인류의 삶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한 토마스 홉스에게 하이에크는 “서로 돕지 않으면 죽게 될 동굴인류가 투쟁만 했다고?”라고 반문한다. “경쟁은 삶을 황폐하게 한다”는 통념에 대해서는 “사회적 경쟁과 생물학적 경쟁의 차이를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하이에크가 우습게 본 사람들 한 가운데는 계몽주의의 대표자 장 자크 루소가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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