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씨’였지만 20년 키웠는데... 치열했던 ‘친자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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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진 기자
입력 2019-05-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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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 '인공수정으로 낳은 아이의 친부' 공개변론

#1985년 A씨와 결혼한 B씨는 어느 날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무정자증인 B씨(남편) 때문에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아기를 기다렸던 아내 A씨와 B씨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정자를 기증받아 시험관 아기시술로 자녀를 갖기로 한 것. 노력 끝에 ‘시험관 아기’는 성공했고 1993년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1997년 아내 A씨는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고, 얼마 뒤 둘째를 출산했다.
아내의 혼외정사를 알 수밖에 없었던 B씨. 하지만 그는 제3자 정자기증을 통해 시험관 아기로 얻은 첫째는 물론 부인의 외도로 낳은 둘째까지 자신의 호적으로 올렸고 친자식처럼 키웠다.
B씨의 정성에도 아내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화를 겪던 두 사람은 2015년 이혼했다. 배신감을 떨쳐내지 못한 B씨는 두 자녀에게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해 버렸고, 곧이어 법원에 ‘친생관계 부존재 확인소송’까지 냈다. 그때까지도 두 자녀는 B씨를 친아버지로 알고 있었다. 

 

공개변론 착석한 김명수 대법원장 (서울=연합뉴스) =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소송 상고심 사건의 공개변론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남의 씨’ 이지만 친자식처럼 호적에 올리고 키웠던 자식. 하지만 남편의 유전자는 하나도 이어받지 않았고, 오직 전처와 ‘다른 남자’의 DNA로 태어난 아이. 그들의 친아버지는 누구일까? 아니 누구여야 할까? 그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임박했다. 

22일 대법원에서는 ‘제3자의 정자로 출생한 아이’의 친부를 가려달라는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이 열렸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흔하지 않은 사건인 만큼 이날 공개변론에는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됐다. 

우리나라는 그간 민법 제844조1항 규정에 따라 법률혼 상태에 있는 여성이 자녀를 출산한 경우 일단 남편의 자녀로 추정하게 돼 있다. 인공수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유전자 감식 기술이 발달하면서 친자를 가려낼 수 있게 되면서 기존의 ‘친생추정’ 법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법률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특히, 인공수정 증가는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3자 제공 정자 출산'이라는 문제를 만들었다.

이날 공개변론에서 대한변호사협회(회장 이찬희)를 비롯해 대한산부인과학회, 한국법철학회, 한국가족법학회, 민사법학회 등 다양한 법조·의학분야 전문단체들이 의견서를 냈다.

변호사협회는 “제3자 제공 정자를 통한 인공수정의 경우, 동의를 했다면 신의칙에 따라 친생부인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밝혔다. 특히, 친생추정 제도와 관련해서도 “현재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된 경우만 예외”라고 봤다.

산부인과학회 역시 “인공수정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부부에게만 시술하고, 친자와 동일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설명한 뒤 진행된다”면서 “그와 같은 신뢰에 변경을 가져와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법철학회와 가족법학회, 민사법학회 역시 친생추정 예외인정을 확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조금 다른 주장을 내세웠다. “최근 친자관계 호소가 크게 늘었다”면서 “입법적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자녀의 복리나 인권보호를 고려해 법원에서 예외를 조금씩 범위를 넓혀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한편, 1심과 2심은 나란히 원고(B씨) 패소 판결을 내렸다. 첫째와 둘째, 모두 법률혼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 출산한데다, 친생관계 부존재 소송을 낼 수 있는 기한이 지났다는 것이 이유다.

특히 첫째의 경우 남편이 제3자의 정자제공을 동의해 태어난 만큼 친생자와 다르게 볼 이유가 없고, 둘째의 경우도 외도로 태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면 친자는 아니지만 ‘양자입적'으로 볼 수 있다는 판단도 함께 나왔다.

우리나라 민법은 법률혼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민법 제844조). 외국체류나 교도소 수감 중과 같이 객관적으로 명백히 동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 한 예외는 없다.

만약 친생자 관계를 부정하려면 재판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3년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

아울러, 친자가 아닌데도 친자로 호적에 올린 경우라면 친자관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양자’입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양자관계는 있다고 본다는 판례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

대법원은 이날 공개변론에서 얻은 의견을 종합해 조만간 기존 판례와 법률해석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사진=대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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