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석 칼럼] 한국형 글로벌 가치사슬, 구축 시급하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윤원석 숙명여대 경영학부 특임교수
입력 2019-04-17 06:5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윤원석 숙명여대 특임교수]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20년을 전후로 동·서양의 역사는 크게 달라진다. 서구는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집약적 생산을 통해 생활수준을 크게 높인다. 동양은 노동집약적 생산에 머무르면서 정체 또는 퇴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경제발전의 역사에서 동·서양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게 된 시기를 대분기(大分岐·Great Divergence)라고 부른다.

동·서양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1820년대는 글로벌 무역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된 농산물과 제품들이 지구촌 차원에서 유통됐다. 글로벌 무역망을 선도한 나라들은 번영한 반면,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못한 나라들은 뒤처졌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해 8월 글로벌 무역의 발전을 3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는 산업혁명 시기인 1815~1914년으로 통합의 시기이다. 영국에 뒤이어 여러 나라가 산업혁명에 나섰고, 조선기술과 항법의 발전으로 새로운 무역루트가 개발됐다. 2단계는 1914~2000년까지로 분업과 재통합의 시기이다. 컨테이너를 활용한 운송과 통신기술 발전으로 무역거래비용이 16%나 줄었으며 무역량도 급격히 늘었다. 3단계는 디지털 기술로 인해 소비자 행동과 생산망의 가치사슬이 급변하는 시기다. 소비시장에서는 온라인 쇼핑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전자상거래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는 제품의 다양성, 제조과정의 혁신과 함께 판촉비용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무역의 글로벌 가치사슬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2000년 이전에만 해도 세계 생산거점은 미국, 독일, 일본이었다. 21세기 들어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자유무역이 확산되면서, 중국이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급부상했다. 지구촌 차원의 생산가치사슬도 미국·중국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한국은 대중국 교역을 크게 늘렸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2011년 세계에서 아홉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글로벌 무역질서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저성장과 공급과잉으로 급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국익을 중시하는 새로운 보호주의가 확대돼 국가 간 교역이 줄고, 생산-유통-판매의 글로벌 가치사슬망이 지역별로 재편되고 있는 것. 최근 미·중 통상마찰로 인해 전 세계 제조허브 역할을 하던 중국의 경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 같은 변화는 가공무역 기반의 중간재 중심으로 수출을 해오던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수출이 지난해 12월부터 4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이는데, 절대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단순히 반도체 가격 하락이나 국내 노동 이슈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글로벌 무역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읽지 못하면 성장은커녕 생존조차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변화에서 생존하려면 첫째, 국내 부가가치사슬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 중간재보다 더 부가가치가 높은 완제품을 늘리는 게 필요하다는 것. 현재 수출에서 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이며 대기업 제품인 휴대폰과 자동차를 제외하면 5% 남짓이다. 달리 해석하면 화장품, 식품, 생활용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중소기업 제품은 전체 수출의 5%밖에 안 된다는 의미이다. 반면 중간재는 우리 수출의 65%를 차지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다. 독일이나 일본 같은 제조 강국의 기업들은 ‘히든 챔피언(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강소기업)’들이 중간재 중 원천기술 기반의 핵심 소재 및 부품 등 부가가치 높은 중간재를 만든다. 이러한 소재 및 부품이 없으면 다음 가공공정이 진행될 수 없다. 우리도 이들 나라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 및 부품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는 산업정책이 시급하다.

둘째, 우리의 제조 및 시장의 가치사슬 거점을 중국에서 동남아, 인도 등으로 빠르게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국·일본·유럽연합(EU)처럼 국내에서 제품 개발, 원자재 및 핵심부품에서 전체 제조공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생태계를 단독으로 구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만큼 그동안 제조파트너였던 중국을 대체할 만한 잠재파트너 국가들과 새로운 가치사슬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 이후를 대비하는 ‘아세안과 인도를 파트너로 하는 신남방정책’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신남방 정책이 단순히 무역 2000억 달러를 달성하고 외교부에 아세안국을 신설해 4강 외교수준으로 올린다는 선언적 의미여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국가 대 국가의 비전을 공유하고 우리의 개발 경험과 제조 역량을 신남방국가들의 자원과 인력과 접목하여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한국형 글로벌 가치사슬이 필요하다. 기업이 개별적으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민간과 공공의 파트너십(PPP) 기반의 경제외교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글로벌 무역질서의 새로운 분기점에서 선도국가로 우뚝 설 것인가, 200년 전처럼 뒤처진 상태로 남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