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숭고(崇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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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2-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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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43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에드먼드 버크와 ‘숭고’
요가수련자는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자신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한다. 그(녀)는 관찰하는 자신, 관찰이라는 행위, 그리고 관찰 대상을 구분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42'에서 그런 삼매경을 ‘유상등지’라고 번역한 ‘사비타르카 삼마팟티(vitarka samapatti)'를 소개했다. 요가수트라 I.43에서는 관찰자, 관찰, 그리고 관찰대상에 대한 정보와 기억조차 사라진 상태를 묘사한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넘은 어떤 것, 즉 ‘위대함’을 이르는 단어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년-1797년)는 '숭고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1756)이란 저작에서 서양철학의 핵심주제인 ‘아름다움’에서 ‘숭고’라는 개념을 분리했다. 아름다움은 빛이 어떤 대상에 비추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빛의 부재인 어둠은 대상의 관찰 자체를 제거해 무의미와 혼동을 야기하고 그 대상에 대한 경외와 공포를 조장한다.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계는 상호배타적이지만, 이 둘 다 쾌락을 제공한다. 숭고는 공포를 자아내지만, 자신이 그 대상에 관한 인식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 유쾌를 선사한다.

버크는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을 전복시킨다. 특히 플라톤이 플레부스, 이온, 히피아스와의 대화를 통해 '향연'에서 정의된 ‘아름다움은 즐거운 경험’이라는 명제를 뒤엎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형태의 기능은 관찰자의 즐거움을 고양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추함’이란 개념을 만들어 추한 작품은 관찰자에게 고통을 준다고 기록했다. 그는 '시학'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을 분석했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인간에게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자신들 안에 숨겨진 제거해야 할 감정들을 배설하는 쾌락인 ‘카타르시스’를 경험시킨다. 아리스텔레스의 추함 개념을 이어받아 로마 신학자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을 창조물 안에 존재하는 신의 은총으로, 추함을 은총의 부재로 설명했다. 버크는 숭고가 가져다주는 생리적인 반응, 즉 그 대상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한 ‘매력’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연구했다. 그는 숭고를 ‘아픔이 부재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상태를 ‘즐거움(delight)'이란 단어를 통해 표현했다. ‘즐거움’은 숭고한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야기되는 고통의 제거에서 드러난다.

쇼펜하우어의 ‘숭고’
독일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1818년)라는 책 단락 39에서 ‘아름다움’과 ‘숭고’와의 관계, 전이과정 그리고 차이에 주목했다.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은 관찰자를 그 자신의 개인성을 초월하여 관찰대상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친절한 초대에 기꺼이 반응할 때 생기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숭고의 감정은 관찰대상이 관찰자를 초대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스스로에게 몰입되어 있어 외부의 관심이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찰자의 경계 안으로 무단으로 침입해 그가 지닌 외부를 인식하는 체계를 허문다.

숭고의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은 인간이 이해하기엔 너무 광대하고 강력해 관찰자를 파괴하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한낱 먼지로 전락시킨다. 우리가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자극과는 달리, 미적인 묵상을 순간에 요구하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을 다음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첫째, 미적인 감정은 관찰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상냥한 대상을 단순히 볼 때 생긴다. 빛이 장미를 비춰, 관찰자의 눈으로 들어올 때 생기는 감정이 아름다움이다. 둘째, 숭고의 약한 감정은 빛이 돌을 반영할 때 생긴다. 관찰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돌을 본다. 이 돌은 장미와는 달리 무생물로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외부의 환경에 의해 변한다. 셋째, 숭고의 약한 감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드넓은 사막이다. 사막은 관찰자의 삶을 유지할 수 없는 물건이다. 넷째, 변화하는 자연이 주는 숭고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편함이라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 자연, 예를 들어 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물들이 초원에서 유유자적 뛰노는 광경을 볼 때 생기는 감정이다. 다섯번째, 파괴적이며 압고적인 자연이 주는 숭고다. 예를 들어 이과수 폭포수 밑에서 온몸으로 물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여섯째, 온전한 숭고의 감정으로, 예를 들어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한 후 지구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과 같은 것이다.
 

'베수비우스 화산폭발' (1773년). 조시프 라이트 (1734년–1797년, 122cm x 176.4cm)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18세기 영국화가 조시프 라이트는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개념을 화폭에 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1773년에 이탈리아 나폴리를 여행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활화산 베수비우스 산에 매료됐다. 그는 그 이후 30점 이상의 화산 그림을 그렸다. 그는 '베수비우스 화산폭발'(1776-80년)이란 그림에서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폭발과 바다의 정적을 대비하여 묘사했다. 산의 중앙에서 용해된 물질이 하얀 연기를 뿜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지만, 오른 편에 보름달이 하얀 구름으로 자신의 일부를 초연하게 가리고 있다. 화폭 앞에서는 사람들이 낙진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요가수트라 I.43
요가수련자가 생각의 대상으로 삼은 대상과 온전히 일치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녀)는 삼매경에 진입한 후, 세상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이란 미로와 같은 구조에서 탈출한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 순간으로 빨려들고,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는 그 방향을 측정하려는 주관자의 임의적인 선택이란 사실을 깨닫고 위가 아래가 되고, 왼쪽이 오른쪽이 되어, 자신이 좌정한 그 자리가 빅뱅이전의 최소실점이며,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언저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파탄잘리는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스므리티 파리슛다우 스바루파 슌여바 아르타마트라 니르바사 니르비타르카(smr̥ti pariśuddhau svarūpa śūnyeva arthamātra nirbhāsā nirvitarkā)"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만일 모든 기억들이 추방되면, 즉 자신의 본성조차 비워지면, 대상 자체만 빛을 발한다. 이것이 무상등지다.”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동시에 일어 나는다. 어떤 대상을 관철하려는 관찰자인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나는 무아(無我)다.

관찰자뿐만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려는 행위인 ‘관찰’도 사라진다. 관찰이라는 행위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이어주는 끈이다. 관찰자는 자신의 시선(視線)이란 도구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상의 내용을 이해한다. ‘삼마팟티’라는 등고의 단계에서는 이 시선조차 사라진다. 관찰이라는 시선은 여전히 관찰자라는 주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관찰이라는 팽팽한 시선으로 서로 밀고 당기다 급기야 관찰 대상만 남는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인식하려는 관찰 대상만 오로지 남는 경지를 요가수트라 I.43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그 첫 단계는 ‘모든 기억의 추방’이다. ‘스므리티(smr̥ti)'는 요가수련자가 관찰하는 대상을 통해 얻는 정보일 뿐만 아니라,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신의 무의식 안에 숨어있는 기억까지 포함한 포괄적 기억이다. 우리가 한 번도 관찰하지 못한 광경을 보았을 때, 그 인식이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무의식 속의 ‘기억’이다. 그는 이런 기억조차 추방한다.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인식하는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자아가 중심이 되어 주위를 자신이 원하는 목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조차 소멸되는 환경으로 들어선다. ‘스바루파(svarūpa)'라는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이데아(rūpa)', '자신 안에서(sva)' 찾은 깨달음의 경지를 이른다. 그런 자신도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빔’이라는 공간 안에서 갑자기 무의미하게 된다. 파탄잘리는 관창대상만 남은 상태를 마치 ‘자신의 본성도차, 시공간이 생성되기 전의 상태, 즉 빅뱅이전의 빔(śūnya)’으로 비유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그 대상만이 빛을 발하며 남는다. 이것이 바로 ‘무상등지(nirvitark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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