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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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1-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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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40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시간(時間)'
무한(無限)은 유한(有限)에서 출발한다. 영원한 시간은 순간의 연속이다. 순간만을 인식하는 나의 삶을 지배하는 괴물은 시간(時間)이다. 시간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의례적으로 알아차리려는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다. 까마득한 옛날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지금 이 순간까지 달려온 시간은, 그 속도를 멈추지 않고 미지의 세계 안으로 영원히 달아날 것이다. 그 하염없이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 나를 위한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나의 최선을 위한 거룩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진입해야 할 ‘또 다른 나’를 위해 거쳐야 하는 경계의 문(門)에서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는 아침 해의 일출(日出)을 가만히 응시해야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시(時)'다. 태양의 움직임과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에서 시간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섬세한 ‘마디’다. ‘마디’를 의미하는 한자 ‘촌(寸)'은 손목에서 맥이 짚이는 곳까지의 거리다.

그 마디의 시간은 순간이면서도 영원이다. 한없이 작은 단위이면서도 한없이 큰 단위다. 5분 전이면서도 빅뱅이 일어났다는 138억년 전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5분 전이나 138억년 전 모두 순간의 마디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얼마나 큰가? 혹은 얼마나 작은가? 한 해는 12달로, 한 달은 28일에서 31일로, 하루는 24시간으로, 한 시간은 60분으로, 일 분은 60초다. 시간은 한 해인가 1초인가? 시간은 1년이면서 동시에 1초다. 1초를 장악하는 사람이 1년을 자신에게 감동적으로 보낼 수 있다. 내 인격과 내 인생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버리는 수많은 생각들과 행동들이 만든다. 내 인격은 내가 떠올리는 이 순간의 생각이며, 내 인생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다.

전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부분들의 공통분모가 전체의 특징이며 성격이다. 내가 오늘 행동한 작은 친절, 배려가 나를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자기 삶의 가장 작은 생각, 말, 행동에서 정직하다. 숭고한 사람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구분 없이 모든 면에서 숭고하다. 나는 사회 안에서 대중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사회 안에서 개인으로 독립적으로 산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모여 대중이 된다. 깨달은 인간들이 모여 깨달은 사회가 된다. 선진적인 인간들의 집합이 선진국이다. 내가 오늘을 개별적으로 친절하고 숭고하게 살 것이다. 그러면 내가 속한 공동체도 친절해지고 숭고해질 것이다.

‘바라밀(波羅蜜)'
나는 무엇으로 이 순간을 잡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지향하기 위한 마음가짐이자 수행이다. 불교에서 붓다의 뜻을 실천하려는 보살(菩薩)이 피안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바라밀(波羅蜜)'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최선을 알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려는 사람만이 이 순간을 영원으로 전환할 힘을 소유하게 된다. 나는 ‘바라밀’을 소유하여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āramitā)'의 한자음역이다. ‘파라미타’는 흔히 ‘완벽’ 혹은 ‘온전’을 의미한다. ‘파라미타’를 설명하는 두 가지 어원설이 있다. 하나는 이 개념은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먼’을 의미하는 단어인 ‘파라마’에서 유래했다. ‘파라마’는 요가 수련자가 도달하고 있는 가장 높은 경지, 혹은 그(녀)가 도달하고 있는 궁극적인 지점이다. ‘파라미타’는 ‘파라마’의 명사형으로 ‘탁월’ 혹은 ‘완벽’으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파라미타’를 두 단어로 구분하여 그 의미를 창출한다. 첫 번째 단어인 ‘파라’는 ‘저 멀리 존재하는 경계’, ‘해변가,’ ‘지평선의 가장자리’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의미인 ‘한계와 초월’이다. 두 번째 단어는 ‘도착한 장소’를 의미하는 ‘미타(mita)' 혹은 ‘(내가) 가는 곳’을 의미하는 ‘이타(ita)'의 합성어로, ‘보통 사람들이 도착한 곳을 초월한 장소’이다.

요가수련자의 목적지는 ‘초월’이다. 인간의 객관적이며 이성적인 판단 안에 존재하는 진, 선, 미를 초월한 숭고(崇高)이며,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 바로 ‘궁극적인 존재’ 혹은 ‘신’이다. 수련자는 자신을 장악하고 조절했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훈련을 시작한다. 그(녀)는 이제 과거의 습관에서 흘러나와 자신을 조절하려는 유혹을 두 눈을 부릅뜨고 인식한다. 그는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 저절로 쉽게 등장하는 마음의 경향, 말의 습관, 그리고 몸의 표현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
 

'제네바 호텔방에서 작은 상을 만들고 있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1944년, 사진가 엘리 로타르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훈습(薰習)
내가 바라밀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방해꾼은 커다란 창과 칼을 들고 있는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오랫동안 은닉된 나의 습관이다. 이 습관들은 그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아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유해한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진단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유해균이다. 사람들은 이 정신적인 유해균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방치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인상을 ‘훈습(薰習)'이라고 한다. 훈습을 지닌 자는 자신이 그런 향기를 풍기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그 안에서 습관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훈습’은 산스크리트어 ‘바사나(Vāsanā)'에 대한 번역이다. ‘바나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거주하다’이다. 내가 오랫동안 어떤 장소에 머무르면서, 그 장소의 환경이 나의 몸에 밴다. ‘바사나’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지금 마음의 상태, 인상, 습관, 그리고 경향이다. 예들 들어, 어떤 사람이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면, 그것이 습관이 된 후, 중독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은 흡연자의 체취를 금방 알아차린다.

인간은 훈습의 표현이다. 나의 정신을 수련하고 고양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생각의 소유자로 전락한다.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육체의 암보다 더 유해한 정신적인 암덩이가 분출된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련자가 마음의 제어를 통해 삼매경으로 들어가려는 방법으로 훈습을 제어하라고 조언한다.

'요가수트라' I.40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40에서 요가수련자가 극복해야 할 궁극적이며 실질적인 가르침을 말한다.

“파라마-아누 파라마-마하트바 안토-스야 바쉬카라흐 (parama-aṇu parama-mahattva-anto-’sya vaśīkāraḥ)"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요가수련자는 이 궁극적인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것까지, 모든 것을 정복해야 한다.

요가수련자는 일상의 가장 작은 원자로부터 가장 큰일까지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배해야 한다. ‘지배’라고 번역한 단어 ‘바쉬카라흐(vaśīkāraḥ)'는 ‘어떤 것을 자신이 원하는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 뜻을 세우다; 의도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바스(va)'와 ‘실제 자신의 일상에서 '표현하다; 행동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카르(kar)'의 합성어다. ‘지배’란 자신에게 숭고한 목적을 위해 마음속에 숨에 있는 훈습까지도 제어하여, 자신의 일상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힘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지배’해야 할 대상을 ‘원자’와 같이 가장 사소한 일에서 우주 전체와 같은 가장 광대하고 중요한 일까지 모두를 한결같이 여겨 완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일이 큰일이고 큰일이 작은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중을 따져 다르게 대처하여, 일을 망치게 된다.

요가수련이란 일상을 모두 철저하게 대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훈련이다. 한자 철저(徹底)가 그런 뜻이다. 자신이 만든 회초리(攵)로 자신을 독려하여 조금씩 걸어가면서 스스로를 가르치는(育) 행위다. 심지어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广)의 가장 낮은 곳(氐)까지 보살피는 마음이다. 전체가 부분이며 부분이 전체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관찰하고 다스리는 것이 곧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다. 철저가 천재다. 나는 작은 일을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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