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취미(趣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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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1-19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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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39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취미
나는 누구인가? 혹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무생물을 포함한 만물 안에서 나의 위치를 고려해 다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무엇인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이 나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과 미래인재를 양성하고 싶어 만든 사설기관인 '건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 사람은 이 대답을 듣고 싶은가? 혹은 내가 지하철 자리에서 앉아있는 태도가 불량해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앉아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인가? 나는 이 상황에서 십중팔구 “나는 한 괜찮은 대학의 교수입니다”라고 말하고 은연중에 상대방에 기선을 제압하려고 폼을 잡을 것인가? 내가 ‘나는 교수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 대답을 통해 이 질문을 던진 사람과 ‘권력관계’ 혹은 ‘주종관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 이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을 모두 학생으로 여기려는 건방진 사람이다. 나의 ‘교수’라는 간판이 나인가?

‘나’라는 존재를 비교적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취미(趣味)'다. 취미는 도시 안에 거주하며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나의 의무다. 나의 직업은 생계를 보장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직업에는 체면, 허례허식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취미’는 내가 나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과 정성을 바쳐 즐기는 행위다.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자주 떠올리는 생각, 자주 하는 말,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좋아해서 자주 하는 행위가 나의 취미다. 취미는 가지각색이다. 취미는 자신의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도 하고 자신이 의도적으로 선택하기도 하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나의 취미를 말한다. 내가 매일 즐기면서 아침이면 반드시 하는 나의 의례이자 취미는 이것이다. 아침 일찍 가만히 약 30분간 하얀 방석에 앉아 내가 오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생각해내기. 명상을 끝내기만을 곁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나의 사랑하는 두 마리 반려견 샤갈과 벨라와 함께 동네 한 바퀴 조깅하기, 집으로 돌아와 앞마당, 뒷마당 싸리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내기, 반려견들을 위해 사료 먹이기, 그들이 마당 뒤편에 싼 변들을 집게로 들어 검은 쓰레기 봉지 안으로 치우기, 집으로 들어와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집안 전체를 밀대를 이용하여 청소하기, 찬물로 샤워하고 책상에 앉아 오늘 할당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글들을 60분 정도 깊이 읽기다. 이 일련의 행위들은 나의 개성을 드러내는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취미다.
 

'데이비드 흄 초상화' 화가 앨런 램시 (1713–1784) 유화, 1754년, 76.2cm x 63.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데이비드 흄의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
스코틀랜드 사상가인 데이비드 흄(1711-1776년)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는 주관적인 ‘취미’에 관한 의미심장한 에세이를 썼다. 그는 경험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 감정 그리고 열정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757년 '네 논문들' 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종교의 자연사’, ‘열정에 관하여’, ‘비극에 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로 구성됐다. 흄은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미학과 예술의 이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아름답다’는 평가를 유발하는 주체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3인칭이 아니라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1인칭이라고 말한다. ‘아름답다’고 판단한 평가의 다양성과 불일치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사람마다 다른 ‘정서’의 차이와 다른 하나는 어떤 대상에 관한 시선을 고양시키려는 ‘배움과 훈련’의 차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정서와 배움의 차이를 통해, 어떤 대상에 대한 미적인 기준이 달라진다.

‘취미’는 주관적이다.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라 감성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객관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배움이라는 훈련을 통해, 자신이 판단하는 미의 기준을 전복시킬 수도 있고 강화할 수도 있다. 이 배움이 바로 ‘취미’다.

배움은 내가 내리고자 하는 취미의 판단 기준을 방해하는 편견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나는 취미생활을 통해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나만의 기준을 만든다. 이 기준이 내 삶의 정체성이며 철학이다. 취미에는 천한 것이 있고 세련된 것이 있다. 천한 취미는 변덕스럽고 방향이 없으며 일회적이다. 그러나 세련된 취미는 방향성이 있고 지속적이다. 후에 이마누엘 칸트는 ‘센수스 콤뮤니스(sensus communis)' 즉,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흄은 이 관계보다, 주체의 문화적인 기질을 강조했다.

‘아비마타’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삼매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련으로 ‘취미’를 소개한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취미에 집중함으로써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요가수트라 I.39'는 다음과 같다. “야싸 아비마타 드야나드-바(yathā-abhimata-dhyānād-vā)" 이 문장을 번역하면 “또는 (요가수련자는) 자신이 선택한 취미에 대한 묵상을 통해 삼매경에 진입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필자가 ‘취미’라고 번역한 산스크리트 단어는 ‘아비마타(abhimata)'다. ‘아비마타’의 뒷부분 ‘마타’는 널리 알려진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동사 ‘만(man-)'의 과거분사형으로 ‘생각된 것’ 즉 ‘생각, 의견, 선택’이란 뜻이다. ‘아비마타’의 의미는 그 어원의 불분명한 ‘아비(abhi)’의 해석에 달려 있다.

‘아비’는 부사 혹은 전치사로 문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에 가까이, -를 향하여’란 의미다. 이 의미로 ‘아비마타’를 번역한다면, ‘간절한 선택, 생각’이란 의미다. ‘아비’라는 단어는 명사로 ‘태양의 첫 번째 광선’이란 의미도 있다. 즉 ‘아비마타’는 ‘섬광과 같은 생각’이란 의미다.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힌두교를 알려 인도 민족주의의 우상이며 영혼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1863-1902)는 아비를 '리그베다 I.64'에 등장하는 ‘아비흐(abhih)'의 축약형으로 ‘두려움이 없는’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아비흐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아비마타’의 의미는 스와미 비베카난다에 의하면 ‘두려움이 없는 생각’이란 뜻이다.

그는 아비를 이용하여 힌두민족주의를 일깨우는 시를 작성했다. “내가 그것(궁극적 실재)이다. 나는 그것이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성도 없고, 교리도 없고 색깔도 없다. 나는 무슨 교리를 신봉하는가? 나는 어떤 교파에 속하는가? 나는 모든 교파에 속해 있다.” ‘아비마타’는 요가수련자가 자신을 감동시키며 삶의 활력을 주는 자신이 매일 매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취미다.

드야나
나는 그 취미를 내 삶의 일부로 만들고 깊이 명상해 내 삶에 아낌없이 강력하게 적용한다. ‘명상’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드야나(dhyāna)'는 ‘자신이 선택한 하나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마음 챙김’이다. 요가수련자는 육체의 운동처럼 마음의 운동을 통해, 군더더기 없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마음을 한데로 모으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이 바로 ‘드야나’다. 만일 내가 한 물건, 한 사람, 한 개념에 정성을 모으면, 나는 그 대상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불경이 기록된 팔리어에서 드야나는 ‘자나(jhana)'가 돼 ‘생각하다, 명상하다’라는 뜻이 됐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드야나’는 ‘선(禪)'으로도 번역됐다. 드야나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하다’란 의미의 인도-유럽어 'dheh-'에서 유래했다. ‘명상’이란 자신을 무한한 우주 안에서 유한한 한 점으로, 무한한 우주를 머금은 거대하면서도 지극히 작은 한 점으로 보는 수련이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 대상이 객관적인 평가를 초월하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는 행위가 바로 ‘취미’다. 그(녀)는 일상에서 자주 하는 일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몰입함으로써 평정심을 획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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