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수준(水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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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6-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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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22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인칭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를 셋으로 구분해 부른다. 1인칭은 ‘나’와 ‘나’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나’라는 1인칭 대명사 혹은 ‘나의 책’에서 ‘나의’와 같은 1인칭 소유형용사는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들이다. 2인칭은 ‘나’와 대등한 관계로 맺어진 상대방, 즉 ‘너’다. ‘너’는 ‘나’하고는 구별된 동등한 대상이다. 3인칭은 1인칭과 관계를 맺지 못한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사실 3인칭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길은 없다. 3인칭을 3인칭으로만 여기려는 마음가짐이 무관심이며 무시다. 인연(因緣)이란 3인칭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2인칭으로 만들려는 과정이며 자비(慈悲)는 3인칭을 1인칭으로 포용하는 마음이다.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 라는 책에서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에 집중했다. 인간은 타자와 이원론에 근거하여 포괄적인 ‘나-너’라는 기반이나 혹은 배타적인 ‘나-그것’을 설정한다. ‘나와 너’에서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깊이 경청해 그 사람만이 지니는 고유함과 온전함을 발견할 때 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상징하는 단어다. ‘너’는 유일하며 스스로 완벽하다. ‘나와 너’의 관계는 대등해 양자가 모두 동등한 존재로 대화한다. 이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고 즉흥적이며 선명하다. 매 순간 진실함이 확인되는 관계로 당연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인간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경탄하는 자연, 혹은 자신이 신봉하는 신적인 존재들일 수도 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다르다. 이 관계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지식이나 경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판단해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유의 관계 안으로 편입시킨다. 3인칭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물건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 관계는 상호보완적이 아니라 일방적이며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여 대상을 판단한다. 한 쪽이 자신의 왜곡된 시선으로 다른 쪽을 판단한다.

마르틴 부버 (1950년경)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다
요가에는 1인칭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현재의 나’로서 1인칭과, 다른 하나는 요가 수련을 통해 완성할 ‘미래의 나’로서 1인칭이다. 요가는 1인칭인 ‘나 자신’이 새로운 1인칭인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수련하는 과정이다. 요가수련자는 현재의 자신을 유기하고 훈련을 통해 자신이 도달할 미래의 자신을 지금 여기에서 연습한다. 요가는 부버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나와 또 다른 나’와의 건설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운동이다.

유대인들의 경전이자 그리스도교 경전인 '출애굽기'는 신의 이름을 히브리인들의 민족 영웅 모세와의 대화를 통해 언급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모세는 원래 이집트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파라오의 아들로 입양됐다. 그는 자신의 동족들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살해한 후 사막으로 도망쳐 양을 치면서 연명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높은 산’에 들어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모세는 한 나무가 불이 붙었으나 연기나 열이 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한다. 그가 이 신기한 현상을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 하자 이 나무가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신발을 벗으세요.”

모세는 말하는 나무에 놀라 묻는다. 그러자 나무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다.” 이 문장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으로 흔히 번역된다. 이 문장이 쓰인 원문 히브리어 표현인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ehye asher ehye)"를 조사하면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추정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아쉐르'는 관계대명사이면서 주어와 서술어를 이어주는 연사(連辭) 역할을 한다. 이 난해한 문장의 이해는 ‘에흐에’에 달려있다. 에흐에는 소위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의 1인칭 미완료동사형으로 ‘나는 –이다’ 혹은 ‘나는 –이 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신이 자신의 이름을 인류에게 처음으로 계시한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현재의 나는 미래에 내가 되고 싶은 나이다.” 나는 이 문장을 근대정신을 연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라틴어 문장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보다 구체적이면서 파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기록한 한 히브리 저자는 신을 천둥, 번개 혹은 산이나 강을 빌려 표현하거나, 자비나 관용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정의하지 않았다. 타인이 아닌 자신 안에서 신을 찾았다.

단계
요가는 ‘현재의 1인칭’이 나에게 감동적이며 내가 흠모할 수 있는 ‘미래의 1인칭’을 합일시키려는 수련이다. 그리스 철학자인 플로티누스(기원후 205-270년)는 인간과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절대타자이며 3인칭의 화신인 ‘신’과의 합일(合一)을 그리스어로 ‘헤노시스(henosis)'라고 불렀다. 요가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신적인 ‘자기자신(自己自身)'을 만나는 훈련이다. 신적인 자기자신은 1인칭이면서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인 3인칭이기도 하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의 특징을 '요가수트라 I.21'에서 간절(懇切)함으로 설명한 후에 I.22에서는 그 간절함의 수준을 구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므리두 마드야 아디마트라트바트 타토피 비세사흐(mr̥du-madhya-adhimātratvāt-tato'pi viśeṣaḥ)." 이 문장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간절함은 약하거나, 중간이거나 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요가수련의 수준이다.” 요가훈련의 성과는 자신이 더 나의 자신이 되기 위해 취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의 수준으로 결정된다. '요가수트라' II권은 요가훈련의 대상을 ‘아스탕카 요가’ 즉 여덟 가지로 구분해 설명했다.

요가 훈련을 위해 고려해야 할 세 부분이 있다. 자세·호흡 그리고 응시점이다. 이 세가지를 ‘트리스타나(tristhana)'라고 부르며, 몸과 마음을 통해 삼매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실질적인 도구들이다. 첫째, ‘자세’다. 산스크리트어로 ‘아사나(āsana)'로 불리는 자세는 요가수련자의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이다. '요가 수트라' II.46은 “그 자세는 떨림이 없어 안정되고 강력하며, 동시에 한없이 편하고 가볍다”라고 말한다.

아사나는 삼매경으로 진입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훈련을 위해 알게 모르게 습관이 된 불필요한 몸짓과 생각을 제거하는 훈련이다. 둘째는 ‘호흡’이다. 호흡은 산스크리트어로 ‘프라나야마(prāṇāyāma)'라고 불리는데 그 뜻은 ‘숨의 연장’ 혹은 ‘숨의 조절’이다. 생물은 매 순간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생명을 연장한다. 만일 일정한 시간, 이 연장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죽는다. 요가는 인간생명연장에 가장 중요한 숨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는 훈련이다. 프라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코로는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삶의 정수다.

세 번째는 마음의 눈을 한 곳에 응시하는 능력인 ‘드리슈티(dṛṣṭi)'다. 요가는 자신이 집중해야 할 하나를 찾는 훈련이며, 그 하나 안에서 핵심적인 하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요가수련자는 훈련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눈을 한 군데 집중하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다. 그 집중하는 장소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는 아홉 개 점이다. 코·미간·배꼽·엄지·손·발·상·하·좌·우.

파탄잘리는 요가 자세·호흡 그리고 응시점을 훈련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므리두(mr̥idu)'즉 ‘약한 단계’다. 므리두는 요가수련을 시작했으나 그 수련이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지 않고 동떨어져 있다. 그는 요가를 1인칭으로 만들지 못하고 여전히 3인칭으로 존재한다. 요가훈련이 지속적이지 않고 삼매의 주위에서 겉도는 형국이다. 두 번째는 ‘마드야(madhya)' 즉 ‘중간단계’다. 요가수련자가 훈련을 지속하지만 그 훈련이 아직 2인칭으로 남아있는 단계다. 그는 요가수련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바쳐 자신의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로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가는 여전히 자신과 구별된 대상으로 남아있다.

셋째는 ‘아디마트라(adhimātra)’ 즉 ‘강한 단계’다. 이 단어는 ‘아디’라는 접두어와 ‘마트라’라는 명사의 합성어다. 아디(adhi)는 ‘넘어선', '탁월한’이란 의미다. 아디는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영역을 초월해 그 너머의 단계에 용맹스럽게 도전할 때 주어진다. 마트라(mātrā)는 ‘측정된 단위’라는 의미다. 마트라는 요가 수련자가 취할 수 있는 어려운 자세일 수도 있고, 높은 단계의 호흡습관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범위 안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범위가 마트라다. 아디마트라는 요가수련의 가장 높은 몰입의 단계로 매 순간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노력이다. 이 단계는 ‘지금의 나’를 극복하는 무아(無我)의 훈련이며, 더 나아가 ‘나에게 이상하고 파괴적이고 동시에 내가 흠모할 만한 나’를 개척하는 ‘참다운 나’인 진아(眞我)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 단계는 현재의 1인칭이 자신이 되고 싶은 1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담금질하는 과정이다. 나는 요가수련을 내 욕망을 위한 유산소 운동으로만 생각하는가? 혹은 나는 요가수련을 사랑하는 연인처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훈련하는가? 혹은 나는 요가수련을 오래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기 위한 엄숙하고 거룩한 훈련으로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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