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용 꼬리'보다는 '뱀 머리'"시진핑의 푸젠성 시절

배인선 기자입력 : 2018-06-01 06:00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⑧ 샤먼시 부시장→닝더지구 서기→푸저우 서기

푸젠성 샤먼 부시장 시절의 시진핑(33세)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980년, 중국 동남부 연해에 4개의 섬이 나타났다. 광둥성의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와 푸젠(福建)성 샤먼(夏門)이 그것이다. '사회주의 붉은 바다'에 자본주의 4개의 푸른 섬을 일컬어 '경제특구'라고 불렀다. 이 4개의 자본주의 섬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의 건의를 덩샤오핑(鄧小平)이 받아들여 생겨난 것이다.

덩샤오핑과 시중쉰 등 개혁파는 동남부 지역 발전이 내륙지역까지 파급효과를 내길 기대하며 “먼저 부자가 되어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외쳤다. 마오쩌둥의 '균부론(均富論)'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균빈론(均貧論)’이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10여년 문화대혁명 광란의 이념투쟁 놀음으로 가산을 탕진해버린 중국은 수출하려고 해도 수출할 물건이 없었기에 우선 외자 유치에 주력해야 했다. 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경제특구라는 이름의 ‘창구’가 필요했다.

푸젠성의 약칭은 민(閩)이다. 민은 옛날 푸젠에 살았던 미개 민족의 이름이다. 바다를 접한 중국의 성(省) 가운데 푸젠은 산악지역이 제일 많다. 전체 면적의 90%가 산으로 이루어진 것. 중국의 우룽차(烏龍茶)의 90% 이상이 푸젠의 산에서 재배된다.

푸젠은 민둥(閩東)·민시(閩西)·민난(閩南)·민베이(閩北), 4개 지역으로 나뉜다. 푸젠 북동쪽 민둥 사람은 무사안일을, 서쪽 내륙의 민시 사람은 조상 숭배를, 북쪽의 민베이 사람은 안빈낙도를 삶의 종지로 삼는 반면, 남동해안의 민난 사람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민난 사람은 농사에는 '젬병'이지만 장사에는 '고수'다. 북동쪽 바닷가 민둥 사람도 배를 타기는 하지만 고기잡이 배인 반면, 민난 사람은 배를 타도 상선을 탄다. 푸젠상인이라면 곧 민난상인을 가리킨다.

푸젠성 성도 푸저우(福州)는 민베이 지역에 위치한다. 시내 인구는 겨우 100만명 남짓이다. 최소한 500만명은 넘어야지 대도시로 치는 중국에서 푸저우는 중소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동남연해 성의 성도 중 푸저우 인구수가 제일 적다. 그러나 푸저우가 푸젠의 베이징이라면 샤먼(夏門)은 푸젠의 상하이다. 민난 지역에 위치한 샤먼이 1980년에 경제특구가 된 이후 푸젠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의 해외화교 약 6000만명 중에는 푸젠어 사용자가 3000만명으로 가장 많다. 대만해협 건너편 대만 국민의 90% 이상도 명말 청초에 건너간 푸젠사람(특히 민난지역)의 후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화교의 60% 이상, 특히 150만명 필리핀 화교 가운데 90%가 푸젠의 후예이다. 그래서인지 샤먼에는 필리핀 총영사관이 주재하고 있다.

1985년 6월 15일, 시진핑은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을 떠나 푸젠성 샤먼시에 도착했다. 32세 생일날이었다. 정딩현 당서기에서 샤먼시 부시장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형식상 수평이동이었으나 1980년대 경제특구 근무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대단한 영전인 셈이다.

시진핑은 샤먼에서 푸젠성 당서기 샹난(項南, 1918~1997년)을 만난다. 샹난은 혁명가문 출신이다. 샹난의 부친 샹위넨(項与年, 1894~1978년)과 시중쉰은 서북 황토고원의 혁명전우였다. 시중쉰은 샹위넨이 1978년 사망하자 장편의 묘지명을 써주었다.

샹난과 광둥성 당서기 런중이(任仲夷)는 중국 개혁·개방을 선두에서 이끈 쌍두마차였다. 둘은 중앙의 덩샤오핑, 후야오방(胡耀邦), 시중쉰 등 6명의 정치국위원과 함께 ‘개혁 8현’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개혁과 개방의 실천을 직접 맛보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샤먼 부시장 부임 첫날 시진핑이 말하자 샹난은 다감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당부했다.

“개혁과정의 실수는 용서하겠지만 개혁을 하지 않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광둥(廣東)성의 특구 선전(深圳)과 주하이(珠海)는 홍콩과 마카오, 산터우(汕頭)는 태국의 투자를 받았으나 샤먼은 대만 해협 건너편 대만의 투자를 받았다. 샹난은 1984년 2월 샤먼을 시찰 나온 덩샤오핑에게 특구 확대를 건의해 그해 5월 샤먼시 경제특구를 2.5㎢에서 2.5131㎢로 확대됐다.

당시 중국 대륙엔 고속도로가 하나도 없었다. 푸저우~샤먼간 300㎞ 거리가 차로 8시간이나 걸렸다. 시진핑은 샹난에게 푸젠성의 제1도시 푸저우(福州)와 제2도시 샤먼 간 고속도로 건설을 건의했다. 샹난은 시진핑의 제안을 칭찬하고 추진해보자고 약속했다. 혁명가문 출신이자 개혁성향의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시진핑은 자신을 아들같이 여기고 알아주는 샹난에 대해 충성을 다할 각오로 의욕에 부풀었다.

그러나 시진핑이 샤먼에 부임한 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의 의욕이 시들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샹난이 ‘가짜 감기약 사건’의 덫에 걸린 것이다.

푸젠성 진장(晉江)의 향진기업이 흰목이버섯을 원료로 가짜 감기약을 제조했다.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은 상황인데 돌연 1985년 6월 당중앙 기관지 인민일보에 가짜 감기약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게재되었다.

수구파는 개혁파의 선봉장 샹난에게 비판의 십자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자본주의 방식인 향진기업에 불만이었던 수구파의 언론플레이였다. 후야오방과 시중쉰이 힘을 써 보았으나 샹난의 파면은 면할 수 없었다. 샹난의 후임으로 수구파의 지원을 받는 천광이(陳光毅, 1933~)가 임명됐다. 그때부터 시진핑은 샤먼에서 은인자중하며 시간의 대부분을 지역 시찰이나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자신의 통산 25년간 지방근무 경력, 특히 푸젠성 17년간 지방당·정·군 수뇌부 업적을 자랑스럽게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술회하길 좋아한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그 살기 좋은 샤먼시 부시장 3년간의 업적은 거의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뚜렷이 내세울 만한 업적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필자가 지난 2주간 온·오프라인 문헌 자료를 전수분석하다시피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1989년 3월 샤먼시 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은 부시장 연임에 필요한 과반수 득표 획득에 실패했다. 부시장급 이상 샤먼시 고위간부 중 시진핑이 유일했다. 낙선의 원인은 업무 실적이 저조한데다가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진핑은 1982년 정딩현 현장 겸 정딩현 무장부 제1정치위원 시절부터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 겸 상하이경비군구 제1서기까지 거의 대부분 해당지역 군·당·정 수뇌를 겸직했다. 그러나 1985~1988년, 그의 나이 32세~35세 3년간만 예외다. 샤먼시 당위원회 상무위원겸 부시장 즉 당·정 간부만 역임했지 군 간부직은 맡지 못했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사마천 '사기' 자객열전>

자기를 알아주던 상사가 떠난 자리에 상사의 반대파 사람이 왔으니 무슨 의욕이 나겠는가? 시진핑은 의욕을 잃고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안팎의 분위기가 우호적이 아니었다. 매사에 밖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참고 감추며 몸가짐을 신중히 해야 했다.

그러나 샤먼 3년은 그에게 공(公)과 사(私) 양면 모두 저조한 세월만은 아니었다. 이혼 후 독신남이었던 시진핑은 1987년 9월 1일 펑리위안(彭麗媛,1962~)여사와 재혼했다(시진핑의 결혼과 가족 등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할 예정).

시진핑은 1988년 6월 35세 나이에 닝더(寧德)지구 서기 겸 닝더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직급상으로는 수평이동의 전직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좌천이었다. 닝더는 푸젠성 동북부 연안의 낙후한 민둥지역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다. 특산물이라고는 조기의 일종인 부세뿐, 빈곤 인구가 푸젠성 전체 농촌인구의 3분 1이었다. 닝더의 상황은 샤먼은 물론 시진핑의 첫 임지 허베이의 정딩현에 비할 바 없이 열악했다.

아래는 시진핑의 닝더시절 회고다.

“닝더에 가기 전 나는 샤먼에서 3년 동안 부시장을 했다. 주로 개혁개방과 특구 건설을 추진하는 일을 했다. 푸젠성 위원회는 샤먼에서의 내 개척정신을 높이 평가(?)해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던 닝더시 서기로 전직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푸젠성 조직부장이었던 자칭린(賈慶林 1940~, 후일 푸젠성 성장, 베이징 시장 정치협상위주석 역임) 동지가 나를 찾아와 “당신이 닝더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천광이 서기와 왕자오궈(王兆國 1941~) 성장 역시 나의 닝더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닝더 간부들의 부패상은 너무 심각했다. 부패척결을 하려하자 '이곳 당간부들의 미움을 사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몇 백명의 미움을 사는 게 좋은가, 아니면 몇 백만명의 미움을 사는 게 나은가. 소수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수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닝더에서 시진핑은 ‘튀지않는 개혁’을 추구했다. ‘낮은 불로 온수를 끓이되 불은 꺼지지 않게, 과열 시 찬물을 붓는 방식'을 택했다. 시진핑은 소박한 옷차림과 겸허한 태도로 버스를 타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추운 날씨에 화장장, 쓰레기 매립장을 다니며 노동자를 만났다. 여름엔 파리가 들끓고 냄새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반 부패로 돌파구를 열었다.

당시 닝더에서는 간부들이 불법으로 집을 건축하는 풍조가 있었다. 극도의 빈곤 속에선 부패 공직자들이 판치기 마련이다. 불법 건축으로 적발된 7000여명의 간부 중, 부현장급 49%인 242명, 과장급 46%인 1399명이 각각 포함됐다. 간부 중 절반은 부패를 저지른 셈이었다.

시진핑은 이에 무자비한 철퇴를 가했다. 닝더지구 화교 연합부주석 정시쉔(鄭錫煊) 등을 파면,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게 하는 등 부패 간부 전원을 행정 및 사법조치했다. 모든 불법 건축 주택도 몰수 또는 철거했다. 이는 당연히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사실은 1990년 5월 21일 자 인민일보에 ”한 가지 일을 잘 처리하니 만 사람의 인심을 얻었다(办好一件事,赢得万人心)“의 제하의 기사로 대서특필돼 당중앙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시진핑은 닝더지구 서기 재임 2년 동안 빈곤탈출 운동에 주력했고 빈민 94%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1990년 8월 12일자 인민일보는 다시 ‘닝더, 최저수입한계선을 넘다’의 기사를 비중있게 실었다. 중국판 ‘잘살아 보세’의 ‘닝더 모델’의 탄생이었다. 

시진핑이 1992년 푸저우에서 출판한 '파탈빈곤(擺脫貧困)'은 닝더 지역 당서기 근무 시절의 기고·연설문을 엮은 것으로 고질적인 가난 탈출 역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시진핑은 그의 푸젠성 근무 17년간 처음 3년 임지, 번화한 민난지역 샤먼에서 이렇다 할 업적은 세우지 못했으나 다음 2년 6개월 임지, 낙후한 민둥지역 닝더를 부패와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이러한 탁월한 실적 덕분에 시진핑은 1990년 5월 15일 푸젠성 중심도시 푸저우시 당서기 겸 푸저우 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 승진 발령을 받는다. 그의 나이 만37세가 되기 딱 1개월 전이다. 그 무렵 시진핑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어 그 뱀을 천하제일의 용으로 웅비시키는 데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임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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