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⑦] 백범의 밥을 챙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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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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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로된 김구 선생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임정 초기 백범 일가. 가운데 어린아이가 큰아들 김인이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임시정부는 고단했다. 일제의 초토화 작전에 밀린 독립군이 흩어지면서 군사조직과 연계가 끊어졌다. 무력이 없는 망명정부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다. 게다가 이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강끼리의 충돌이 잠시 멈춘 때였으므로, 국제정치의 틈새를 파고들 여지도 없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자, 공산주의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미국과 만주를 삼키려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미국의 안중에 조선 독립이 들어 있을 리 만무했고, 이 당시 임시정부에 지원의 손길을 뻗친 나라는 레닌이 이끄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유일했다. 이에 따라, 상해에서도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백범이 임정의 기둥이 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한 백범은 미주 동포들에게 부지런히 서신을 보내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 그렇게 들어온 돈으로 임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조직했다. 수당의 표현대로, “백범은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며 사는 분으로, 가족 생계에는 무척이나 인색했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 여사 장례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백범 가족. 앉아 있는 어른이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아내의 임종도 보지 못한 백범
첫아들 후동을 낳고 셋방살이로 전전하던 수당과 성엄 부부에게, 일파 엄항섭이 함께 살자고 제안을 했다. 임정 요인의 일가붙이들은 어느 집 할 것 없이 한식구나 다름없었지만, 성엄과 일파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보다 더 가까웠다. 일파의 부인 연미당은 수당을 아주머니라 부르며 따랐고, 후동과 일파의 아들 기동은 형제마냥 자랐다.
수당 가족의 셋집이 있던 아이런리(愛仁里)와 백범 가족이 살던 융칭팡(永慶坊)은 근처였다. 백범의 식구는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부인 최준례(崔遵禮), 큰아들 인(仁) 넷이었다. 상해생활 초기 시아버지 뒷바라지를 했던 융칭팡 집, 수당은 시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곳에 수시로 들렀다.
결핵을 앓던 백범의 부인이 둘째아들 신(信)을 낳고 계단에서 굴러 심한 낙상을 입었다. 세관 유인욱의 알선으로 외국계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에 무료로 입원을 했다. 백범의 어머니가 두 손자까지 돌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수당은 백범의 집에 붙어살다시피 하며, 늙은 어머니를 수발들고, 갓난아이의 기저귀까지 만들어 보살폈다.
병원은 일본인 거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범은 아내의 문병도 못 가는 처지였다. 이듬해 1월 1일, 최준례는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임종을 지킨 수당과 성엄이 백범을 모셔오겠다고 말을 꺼내자,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곽낙원은 아들의 독립운동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두 손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백범은 임정 청사에서 기거했다.

 

[백범과 큰며느리 안미생, 해방 후 경교장에서.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석오 이동녕은 일파의 집에서 살았다. 아무리 궂은일이라도 어른 모시는 데는 빈틈이 없는 수당을, 석오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수당에게 독립운동이 지나온 날들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1911년, 석오가 이상룡, 이회영 등과 함께 랴오닝성(遼寧省) 유하현에 세운 경학사(耕學社)는 해외에 건설한 최초의 동포 자치단체로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그 역사를 배우며, 수당은 독립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새겼다.
임정은 석오와 백범, 두 어른이 책임지는 셈이었다. 자신에게 돈 쓰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하는 백범이다. 수당이 정성껏 기워 만든 백범의 헝겊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구멍이 났다. 바닥이 뚫려 목만 댕그라니 남은, 신발이라 할 수도 없는 애처로운 헝겊신을 신고, 백범은 돈 만들랴 조직 키우랴 동분서주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가 밥 챙겨 먹겠는가. 이곳저곳 뛰어다니던 백범이 서너 시쯤 되면 수당의 집으로 온다. 백범은 우람한 체격만큼 대식가였다. 그런 어른이 쫄쫄 굶다가 슬그머니 나타나,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라며 계면쩍은 미소를 짓는다. 그럴 때마다 수당은 찬거리를 마련하러 부리나케 시장으로 뛰었다.
수당이 밥을 짓는 동안 백범은 후동이를 얼렀다. 후동이는 낯을 심하게 가렸는데, 유독 백범의 품에서는 보채지 않았다. “왜놈 잡는 일에는 그렇게 무섭고 철저한 분이지만, 동고동락하는 이들에게는 당신 자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겉으로 나타내는 법 없이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며 격의 없는 분이 백범이었다.”(<장강일기>, p96)
 

[성엄 김의한과 아들 후동. 서 있는 어린이가 백범의 둘째아들 김신이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장남마저 독립운동 제단에 바치고
백범은 담배를 엄청나게 피웠다. 궐련 50개비가 들은 동그란 통 하나를 하루에 다 해치웠다. 천성이 과묵한 그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꾹 참고 담배만 태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당의 가슴은 아렸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제대로 차린 밥 한 끼 지어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대단한 꼴초가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었다.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은 재주는 많은데, 자꾸 말썽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쳤다. 백범은 그에게 이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자면서, 그 맹세로 자신도 담배를 끊은 것이다. 몇 년 뒤,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기고 나서의 일이다.
백범과 안중근의 집안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진압에 동원된 관군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만큼 농민군에 부정적이었으나, “애기접주” 김구가 피신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었다. 훗날,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安美生)은 백범의 큰며느리가 된다.
백범의 큰아들 김인은 부친을 따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그는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설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 직할 독립군을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1945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큰아들이 폐결핵에 걸려 중태에 빠지자 며느리가 페니실린을 구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백범의 대답은, ‘동지에게도 약을 못 구해주었는데, 어찌 아들에게 약을 쓰겠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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