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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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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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읍작전이 끝난 후, 차일혁에게 닥친 여러 가지 일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는 1951년 5월 2일, 정읍작전을 마치고 전주로 돌아왔다.

 오후 2시 30분 제18전투경찰대대는 전주서중학교에 도착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가고, 차일혁은 곧장 도경찰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지난 3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의 ‘빨치산토벌 종합보고’가 있었고, 이어 유공부대 및 유공자에 대한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 그리고 치안국장의 표창 수여식이 있었다. 전라북도가 기간 중 전국에서 빨치산토벌에 있어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거두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

 임실·고창·순창·무주경찰서장과 서원들에게 표창 및 포상이 주어졌고, 차일혁 부대에게는 특별공로상이 수여되었다. 김가전(金嘉全) 지사의 격려사가 끝나자,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차일혁에게 빨치산토벌을 하면서 느낀 점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갑작스러운 일이라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전북도내 거의 모든 기관장과 군 관계자들, 그리고 미 고문관까지 참석한 자리인데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차일혁은 이에 대한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지만, 토벌작전 중 느낀 점들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머릿속을 정리했다. 빨치산토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이 중요하다는 것과 투항하는 빨치산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관대해 질 것을 골자로 한 전투소감을 발표하기로 마음먹은 차일혁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표를 하게 됐다.

 “평상시 행정경찰의 개념을 떠나 비상시의 경찰, 즉 전투경찰로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산간벽지에 있는 동포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피난을 가지 못한 죄로 군경(軍警) 토벌대와 빨치산들 틈바구니에 끼여 군경들에게는 빨치산 취급을 받고, 빨치산들에게는 병력과 물자 보급처(補給處)로서 수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호할 법적 절차가 시급합니다. 어떻게 보면 통비분자(通匪分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을 하루 빨리 안정시켜 자기들 스스로가 마을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민들이 주경야전(晝耕夜戰)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귀순하거나 생포한 공비들에 대해서도 처벌보다는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을 세워 토벌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면, 빨치산 토벌에 있어 보다 많은 경비(經費)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 제18전투경찰대대에 있는 몇몇 빨치산 귀순자들은 누구보다도 용감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과감한 사면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빨치산들도 우리 측에서 그들의 생명을 보장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보다 많은 자들이 귀순할 것입니다. 빨치산토벌은 전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여러 관계자들의 획기적인 조치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일혁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빨치산 토벌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근거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차일혁은 그렇게 해야만 빨치산을 완전히 소탕하고, 후방지역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차일혁이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견지했던 빨치산 토벌의 대원칙이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도경(道警)에서 경찰국회의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차일혁은 그동안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18전투경찰대대로 들어오는 각종 성금과 위문품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차일혁 부대의 이름이 도내(道內)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성금과 위문품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급격히 증가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차일혁은 경리주임을 비롯하여 관계관들을 불렀다. 차일혁은 그들에게 “왜 이렇게 갑자기 성금과 위문품이 늘어났는가. 혹시 강제로 거둔 것은 아닌가?”라며 넌지시 물었다. 세 명이 모두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차일혁은 집히는 것이 있어 약간 언성을 높이며, “이것 모두가 강제로 거둔 것이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라고 질책하자, 그들은 “지금의 부대 예산으로는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기부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라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차일혁은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당장 돌려주도록 하시오. 부대 살림이 힘들더라도 참고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떳떳하지. 기부금을 거둔다면 우리 부대에 거는 시민들의 기대와 신뢰는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경찰이 시민들의 신뢰를 잃는다면 어찌 경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점잖게 타일렀다. 그리고서 차일혁은 경리주임을 시켜 기부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다시는 강제성 기부금을 걷지 말라고 엄중히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누구 할 것 없이 예산부족으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차일혁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늘어난 대원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전투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운 문제였다. 차일혁 부대는 연일 빨치산토벌에 신명을 다하고 있으나, 예산부족으로 마음껏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기부금을 받는 것보다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위민(爲民) 및 민주(民主)경찰로서의 위신이 선다고 여겼다.

 차일혁은 토벌작전을 할 때는 그렇게 용감할 수 없었지만, 막상 전투가 끝나고 나면 주민들을 위해 호의를 베풀었다. 차일혁에게 그런 일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일상(日常)이 되다시피 했다. 칠보발전소 작전이 끝난 다음에도 치안국장이 표창장과 부상으로 30만원을 금일봉으로 차일혁에게 줬지만, 그는 그 돈을 봉투째 전북일보로 보내 이재민 구호성금으로 내놓았다. 이런 차일혁의 선행에 대해 전북일보에서는 “차 대장 이하 전 대원이 멸공구국과 민폐제거(民弊除去)에 불타는 조국애와 동족애를 표시한 것”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김가전 지사도 “이는 그야말로 민주경찰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는 행동으로 전 경찰관의 귀감(龜鑑)이다.”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차일혁 부대는 산간벽지에서 작전을 하면서도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대원들은 남루한 전투복에 군화조차 없어 짚신을 신은 대원이 7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차일혁 대원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부대장인 차일혁을 믿고 따랐다. 그리고 전투에서 빨치산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맹호부대원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들은 오히려 차일혁의 부대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차일혁과 그의 부하들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부하들을 믿었고, 부하들은 상관인 차일혁을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비록 차일혁 경제적으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찰로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그리고 책임감있게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만큼 그 어떤 부대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과 그 대원들은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았다. 어쩌면 차일혁 부대는 그런 면에서 달관(達觀)한 편이었다. 그런 차일혁에게 아무리 부대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강제 기부금까지 걷어가며, 주민들에게 누를 끼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일혁이 전투에서 벗어나 비교적 여유를 갖고 부대정비를 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그때가 1951년 5월 6일이었다. 그것은 차일혁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픈 소식이었다. 전날 저녁 늦게 8사단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정읍으로 가던 중 1중대장 우희갑(禹熙甲) 경위가 정읍군 북면 지서 앞에서 빨치산들의 기습을 받고 운전사와 함께 전사했다는 것이다.

 우희갑 경위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중견 간부로, 차일혁에게 있어서 부하이면서 아끼는 동지였다. 차일혁은 우희갑 경위가 전사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차일혁은 밤중에 그가 작전 수행 차, 떠날 때 잡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차일혁과 이병선 작전참모가 밤이 늦었으니 다음 날 출발하라고 했지만, 책임감이 유난히 강했던 우 경위는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준비를 해야 한다며 기어이 떠났다. 그리고 그 책임감 때문에 전사하게 됐다.

 차일혁은 그때 우 경위를 강력히 잡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구이면작전,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고창군 심원면, 입암산, 내장산 등지의 전투에서 전투하던 우 경위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던 믿음직스러운 중대장이었다.

 그런 우 경위가 죽다니 차일혁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죽은 우희갑 경위를 위해서 상관으로서 해야 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차일혁은 슬픔을 잠시 밀어두고, 죽은 우 경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하기 시작했다.

 차일혁은 먼저 우휘갑 경위의 전사(戰死)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고, 경감으로의 일 계급 특진을 상신(上申)했다. 우 경위에게는 미망인과 2남 1녀가 있었다. 우 경위의 전사 소식을 들은 2중대장 이원배 경위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우희갑 중대장 못지않게 침착하고 용감했던 이원배 경위는 선의의 경쟁자이면서 동지였던 우 경의의 전사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차일혁이 보기에 우희갑은 작전 수행시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욕이 앞서 싸울 때도 있었다. 부하들에게는 엄격한 중대장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다 보니 가끔 실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차일혁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누구 못지 않게 정도 많이 들었다. 마치 형제이상으로 친했다. 그런 우희갑이었기에 차일혁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날씨마저 잔뜩 찌푸린 가운데 우희갑 중대장의 영결식이 있었다. 부대 본부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경찰 악대의 구슬픈 주악에 맞추어 초혼 분향이 있었고,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의 애끓는 조사(弔詞)가 있었다. 상주격인 차일혁은 조사 순서가 되었지만 우 동지와 마지막으로 영결하는 자리라 생각하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우 동지의 얼굴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우 동지, 엄동설한에도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항상 웃으면서 출전하던 우 동지가 혼자서 우리의 곁을 떠나다니......”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차일혁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내는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전주 여중생들이 부르는 조가(弔歌)를 들으며, 그의 영구는 고향인 이리(현 익산)로 향하였다. “용감한 자는 가고, 비겁한 자만 남는 것” 같아, 차일혁의 마음은 우울하기만 했다.

 우희갑 경위의 슬픔이 잦아진 어느 날, 차일혁은 부상당한 대원들이 입원한 병원을 들렀다. 우희갑을 잃은 슬픔도 있었고, 부상당한 대원들도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동행했던 김만석 기자가 “잠시 이리 좀 오시지요.”하며, 피난민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실로 들어갔다. 뒤따라 간 차일혁이 병실을 들여다보니 병실은 유리창도 없는 좁은 마룻바닥에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신음하는 환자들의 모습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가족을 잃어버린 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48명의 환자들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치료는 물론이고,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환자들인 그들의 상처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고통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외치는 신음소리와 비명소리는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피난민 병실에 세 명의 의사와 세 명의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골절상을 입은 환자들이라 이들을 치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군인아저씨 제발 내 자식을 살려주세요.”하며 아주머니 한 분이 차일혁의 다리를 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 아주머니는 “딸이 하나 이미 이 병실에서 죽어 나갔습니다. 제발 마지막 남은 딸 하나라도 살려주세요.”라며 애원했다.

 차일혁은 아무 말 않고 서울에서 피난 왔다는 아주머니의 어린 딸을 안고, 병실을 나왔다.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이 입원한 병실로 가서 부상 정도가 가벼운 대원에게 아주머니의 딸을 보살피게 했다.

 애국부인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나, 군경 부상자들을 돌보기에 정신이 없어서 피난민 환자들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차일혁은 김만석 기자에게, “신문에 피난민 환자들의 비참한 실태를 적어서 사회 각층의 온정을 모으도록 해야 되지 않겠소?”라고 말하자, 김 기자는 “피난민 환자들의 실태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전주에서는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어서 큰 기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저도 비슷한 기사를 썼습니다만, 다른 일이 계속 생기니까 되풀이해서 게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 대장이 직접, 편집국장에게 건의를 한다면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차일혁은 당장 부대에서 도울 일이 없나 궁리하다가 대원용으로 준비되어 있는 속옷이라도 우선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전북일보 편집국장에게 여러 차례 사정을 이야기해서 ‘피난민 환자 돕기’를 보도하게 됐다. 보도덕분에 많은 성금이 모여 피난민 환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차일혁은 전투가 없는 날에는 어쩌면 더 바빴다. 일 복(福)을 타고난 사람 같았다. 전투할 때도 가장 강적(强敵)을 맞아 어려운 전투만을 골라 하면서도, 전투가 끝난 후까지 차일혁에게는 조금의 쉴 틈도 없었다. 주변 환경이 차일혁을 쉬도록 만들어주지 않았다. 뭔가를 하게 했다. 정읍작전이 끝난 후에도 모처럼의 망중한(忙中閑)을 보내려던 참인데, 그에게 닥친 여러 애환(哀歡)들이 그를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주민들을 보살피고,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차일혁은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와중에 차일혁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우희갑 경위를 애통(哀痛)함 속에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 차일혁의 애끓는 슬픔이 하늘에 닳았던지 지금 두 사람은 대전현충원에 나란히 묻혀 있다.

 아마 차일혁과 우희갑, 두 호국영령은 6·25전쟁 때 치렀던 구이면 작전부터,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고창작전 그리고 정읍작전에 얽힌 이야기들을 조국의 밤하늘을 보며 두런두런 나누지 않을까 싶다. 그런 두 호국영령의 이야기가 정읍주민들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차일혁이 유난히 애착을 갖고 싸웠던 정읍에 ‘차일혁 경무관’ 흉상이 건립된다고 하니 무엇보다 기쁘다. 이 또한 정읍주민과 차일혁 경무관과의 깊은 선연(善緣)이 아닌가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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