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6]1963년 수출입 링크제 시행···연간 수출 8600만달러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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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22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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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6)

  • 제5장 재계활동 - (91) 자신감 넘치는 학생들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64년은 목당(牧堂) 이활(李活)에게 더없이 바쁜 한해였다. 선거를 치르고 정치무대에 나서자 김·오히라(金·大平) 메모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한국 무역협회는 1963년을 ‘수출 제일(輸出 第一)의 해’로 정하고 수출입(輸出入) 링크제(일정한 수출입을 수량이나 금액 따위와 관련지어 수출한 만큼 수입을 허가하는 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된 데 힘입어 수출액(輸出額) 8600만달러라는 최고 기록을 냈다. 박충훈(朴忠勳) 상공부장관의 재등장으로 업계와의 협조가 원만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수출무역은 활기를 띠게 되었고, 4월 22일에 있었던 제19회 정기총회는 회장(會長)에 이활, 부회장(상근(常勤))에는 한상원(韓相元)을 유임시키는 안(案)을 만장일치로 가결함으로써 협회는 순조롭게 운영되어 갔다.

목당은 그날그날의 일정(日程)을 보아, 국회와 무역협회 및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에 시간을 안배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재단법인 중앙학원은 1963년 6월 26일 제정 공포된 사립학교법에 따라 1964년 4월 25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高麗中央學院)으로 명칭을 변경함과 동시에 정관(定款) 내용도 대폭 개정해야 했다.

학교법인 교려중앙학원의 임원도 개선을 보았지만 빈자리를 채우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사장(理事長)      이   활
이   사(理   事)      김영주(金泳主) 김연수(金秊洙) 최두선(崔斗善) 소병곤(蘇秉崑)
                         유진오(兪鎭午) 김상만(金相万) 조동식(趙東植) 최복현(崔福鉉)
감   사(監   事)      이아주(李娥珠) 김용완(金容完)
사무국장(事務局長) 윤재중(尹在重)

주무이사(主務理事) 호칭을 이사장(理事長)으로 바꾸었고 이사에 김상만, 감사에 이아주·김용완이 새로 선임되었을 뿐이었다.

4월 혁명(4月 革命)의 봉화를 든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자신감은 애교심으로 발전하고 교내 활동에도 의욕적이었다. 순전히 학생들의 창의(創意)와 노력으로 교정에 호상(虎像)을 건립하는 일이 추진되고 개교기념일 때의 축하행사가 ‘석탑축전(石塔祝典)’의 이름으로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연대(延大)와의 정기경기(定期競技)는 대사회적(對社會的)으로 무게를 더해 갔다.

자신감은 졸업반 학생들의 성의와 노력으로 이어져 석탑장학회(石塔獎學會)가 설립되기도 했다. ‘고대신문(高大新聞)’과 ‘고대문화(古代文化)’의 격조가 갑자기 높아진 것도 이때이다.

학생들의 넘쳐흐르는 자신감(自信感)의 발로를 보며 목당은 지난날의 학생 생활로 돌아간 듯한 흥분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자신감은 격렬한 사회참여(社會參與) 의욕으로 폭발되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목당은 데모에 나서는 학생들의 동기(動機)는 언제나 순수한 자연발생적인 것임을 믿었고 순수성(純粹性)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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