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5]김·오히라 메모 의혹 증폭···6·3 사태로 번져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6-08-22 07:22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5)

  • 제5장 재계활동 - (90) 정치폭풍(政治暴風)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군정(軍政) 하(下)의 한·일 국교정상화(韓·日 國交正常化) 교섭 주역은 김종필(金鐘泌)이었다. 5·16 직후 중앙정보부를 창설, 그 책임을 맡은 김종필 부장은 1961년 10월 대통령특사(大統領特使)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케다((池田) 수상을 만났다. 그리고 1962년 10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히라(大平) 외상(外相)을 만나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한·일 교섭의 최대 숙제의 하나였던 청구권(請求權) 문제 타결 원칙을 세운 이른바 김·오히라(金·大平) 메모를 성립시켰다. 무상청구(無償請求) 3억 달러와 유상(有償) 2억 달러(정부(政府) 베이스 차관(借款)), 상업차관(商業借款) 1억 달러에다 플러스 알파라는 합의를 성립시키고 이를 오히라 외상 책상 위에 있던 메모지에 써서 각자 보관한 것이 소위 이 메모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헌정 하에 재개된 대일(對日) 교섭에서 주역의 위치를 지켰다. 그런데 야당과 자식인인 일반, 그리고 학생들은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의 대일 교섭을 철저하게 불신했다. 국가와 국민의 주요 이익이 걸린 평화선(平和線)과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 등의 문제에서 석연치 않은 것이 많다고 국민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정부의 대일교섭은 굴욕적인 저자세(低姿勢) 외교(外交)였다고 몰아부쳤다.

이런 불신의 원인은 막후 흥정에서 만들어진 김·오히라 메모의 이면에 숨겨진 의혹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부는 김·오히라 메모엔 청구권 타결 원칙만 담겨져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야당은 믿지 않았다.

군정(軍政) 주체들이 민간 정부를 계속 담당하려는 데에 필요한 막대한 정치자금을 일본측이 대겠다는 약속이 곁들여져 있다는 것이 정가(政街)에 나도는 풍문이었다.

이런 막후의 검은 흥정 때문에 청구권이 낮게 책정됐고, 평화선은 아무런 보상이나 다른 안전판(安全辦)의 설정 없이 폐기되어 어민들로 하여금 생활 터전을 잃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야당은 국회에서 김·오히라 메모의 내용을 공개하고 의혹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학생 데모가 캠퍼스에서 열기를 더해가고, 야당 진영의 반대 함성도 점점 거칠어져 갔다.

3월 24일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국회에 나가 있는 동안 고대생(高大生)들의 데모가 터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급히 학교로 돌아가니 학생들은 배구코트에 모여 성토대회(聲討大會)를 열고 있었다. 곧 그들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평화선은 생명선(生命線)이다”, “한국에 있는 일본상사(日本商社)를 즉각 철수시키라”, “국민의 의사(意思)를 존중하라”, “우리들의 자유의사(自由意思)를 무력행사(武力行使)로 짓밟지 말라”, “한·일회담(韓·日會談)을 즉각 중지하라”, “왜 일본을 신임해야 하는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은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데모대(隊)는 여러 차례의 저지선(沮止線)을 뚫고 곤봉 세례를 받으면서 목적지로 돌진했다. 서울대와 연대생(延大生)들도 거의 같은 시각에 거리로 뛰쳐나갔다는 소식이었다. 대학가(大學街)는 다시 소란해졌다.

열풍은 식을 줄을 몰랐다. 마침내 정부는 3월 26일,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나 이 이상의 시위는 외교에 도움이 되지 안는다”는 담화를 냈다. 3월 30일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학생 대표와 면담하고 한·일 교섭에 대한 학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정부도 별도로 학생대표들을 불러 김·오히라 데모에 관한 비공개 설명까지 했다.

엄민영(嚴敏永) 내무부장관은 이 때 박 대통령에게 진언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마지막 임무는 평화적 정권교체(政權交替)의 전통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회에 나가 공약으로 밝히고 시국수습(時局收拾)을 위한 대동단결을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엄 내무(嚴 內務)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일회담도 정해진 원칙에 따라 계속 밀고 나갔다. 그럴 때 삼민회(三民會) 소속인 김준연(金俊淵) 의원은 김·오히라 메모의 대가로 2000만 달러의 검은 자금이 군정 주체에 건네졌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들었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마침내 강경(强硬)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야당과 학생의 반대 열풍도 그에 상응하여 거칠어져 정가를 뒤흔들었다. 공격은 메모 작성의 장본인인 김종필과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었다.

내각이 온건하게 사태에 대처하고, 공격의 표적이 된 김종필과, 그가 이끄는 공화당은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자, 단호한 시국 수습책으로 방향을 잡아 나간 것이 박 대통령이었고 그 뜻을 재빨리 수행해 나간 것이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5월 9일, 박 대통령은 내각을 개편했다. 최두선(崔斗善) 내각이 퇴진하고 정일권(丁一權) 총리, 장기영(張基榮) 부총리, 양찬우(梁燦宇) 내무, 김성은(金聖恩) 국방으로 축을 이루는 돌격내각이 탄생했다. 총리가 젊은 예비역 대장으로 바뀌고 내무부장관 또한 예비역 장성으로 교체된 것이다.

5월 27일, 박 대통령은 정부의 단호한 다스림을 경고했다.

“정국 불안의 요소는 일부 정치인의 무궤도한 언동(言動), 일부 언론인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있다.”

끝내는 6·3 사태(事態)라는 국가적 불행을 자초했다. 즉 학생들의 대거 봉기(大擧 蜂起)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원을 무기한 폐쇄했으며 군인이 학원에까지 주둔하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계엄군(戒嚴軍)은 정치인·언론인 및 학생 등 수백명을 체포·감금하고 보도관제(報道管制)를 실시했다.

국회는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조사단을 구성했지만 공화당이 과반수를 점한 조사단의 힘으로 흑백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조용한 가운데 신학기를 맞아야 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