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간 안보 및 통상·투자 현안을 둘러싼 우려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럽 외교가에서도 한국의 대러시아 접근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내세워 북극항로 개척 등을 위해 러시아와 제한적 협력을 모색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 기조와 양자 관계 관리 사이에서 명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외교·안보 현안이 동시다발적으로 불거지면서 정책 조정의 컨트롤타워인 대통령실의 대응 능력도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상황에 따라 외교·안보 라인에 대한 책임론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30일 외교가에 따르면 최근 한국의 대러 접근을 바라보는 유럽 외교관들의 우려가 기존의 정책 비판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가’라는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유럽 외교가에서 국내 대러정책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한 외교 관계자는 “유럽 측에서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 확대하려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타진이 잇따르고 있다”며 “주로 북극항로 시범운항과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 등이 겹치면서 한국 정부의 대러 기조에 변화가 있는지를 묻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앞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8일 서울 주재 유럽 외교관들을 인용해 한국의 북극항로 시범운항과 대러 석유제품 수송 논란 등이 유럽의 우려를 키웠다고 보도했다. 유럽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한국을 ‘유사입장국’으로 계속 신뢰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보도된 것은 이례적이다.
FT는 러시아의 광범위한 협력이 필요했던 북극항로 시범운항을 한국의 대러 외교·경제 접근을 상징하는 사례로 지목했다. 이와 함께 군수품 생산에 전용될 수 있는 컴퓨터수치제어(CNC) 기계의 대러 수출 통제 문제, 지난해 11월 국가정보원 유관기관과 러시아 싱크탱크 간 비공개 회의, 러시아 특사를 지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평화외교특별보좌관 위촉 등도 거론했다.
이러한 우려는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협력이 심화하면서 유럽과 한반도의 안보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인식이 확산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도 지난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한국의 안보는 유럽의 안보와 직접 맞닿아 있고 유럽의 안보도 한국의 안보와 맞닿아 있다”며 “북한군이 돈바스에서 우크라이나군과 싸우면 유럽의 자유가 위험에 처하고, 모스크바가 평양에 무기를 공급하면 그 영향이 유럽에 미친다”고 언급했다.
한미동맹을 둘러싼 우려가 채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유럽에서도 한국 외교의 일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정부로서는 대미·대유럽 신뢰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는 평가다.
청와대도 이날 대러 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선을 그으며 진화에 나섰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계속 동참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위 실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하면서 대러 제재와 수출통제를 일관되게 이행해 온 정책에도 변함이 없다”며 “이는 우리 국민과 기업의 경제적 부담에도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협력이 한국과 유럽의 안보에 동시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우방국들과 충분한 조율 없이 대러 접촉을 확대할 경우 외교적 운신 폭을 넓히려는 시도가 오히려 한국의 안보적 입지를 좁힐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석학교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축소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고, 대통령의 북극항로 관련 발언을 러시아가 확대 해석했기 때문에 유럽이 의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북극항로 시범운항처럼 동맹과 사전 협의를 거쳐 양해 받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대러 전략 활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진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도 “대러 제재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연대를 유지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계속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두 위원은 “EU가 추진하는 대러 제재 조치를 존중하고 한국도 정책 공조를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내야 한다”며 “대러 접근을 추진하더라도 미국과 유럽 등 우방국에 충분히 설명해 불필요한 의심을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러정책뿐 아니라 한미 통상·정보·전작권 문제와 대유럽 안보 협력 등 여러 현안이 맞물리면서 대통령실의 종합적인 정책 조율 능력도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외교·안보 소식통은 “현재 외교 정책상 가장 큰 문제는 동맹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며 “한미관계 등 동맹과 주요 안보 현안에서는 대통령실과 정부가 동일한 상황 인식을 공유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율되지 않은 모습이 반복될 경우 외교·안보 라인에 대한 책임론이나 인적 쇄신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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