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유럽, 경제 약화로 좌절 체감…한국, 흔들림 없이 방향 지켜야""

  • 이준 주한프랑스상공회의소 명예회장·부회장 인터뷰

  • 경제적 불안에 흔들리는 사회…유연한 민주주의 필요

  • 근본적 문제는 경제··韓 견고한 경제 강점 이어가야

  • 韓기업들, 유럽 정세 변화 기회로 협력 모색해야

이준 주한프랑스상공회의소 명예회장부회장 겸 유럽 전문 싱크탱크 KEY 이사장
이준 주한프랑스상공회의소 명예회장(부회장) 겸 유럽 전문 싱크탱크 KEY 이사장

"유럽은 지금 경제 약화가 불만과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은 외부 세계가 높이 평가하는 자신의 강점을 돌아보고, 이를 지켜 나갈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유럽 문제 관련 주요 전문가로 손꼽히는 이준(필립 리) 주한프랑스상공회의소 명예회장(부회장) 겸 유럽 전문 싱크탱크 KEY(Korea Europe & You) 이사장은 최근 본지와 서면으로 인터뷰하면서 프랑스 등 유럽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 시위가 경제 약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며, 한국이 경제 내실 강화에 방향을 맞춘 정책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한국 기업들이 현재 유럽 정세 변화를 기회로 삼아 유럽과 협력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지난달 학생들이 교육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작된 프랑스 시위는 고물가, 청년 실업, 양극화, 이민 문제 및 재정 개혁 등에 불만을 품고 있던 청년층과 노동자 계층으로까지 확대돼 약 한 달 만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시위를 틈타 프랑스 각지에서 방화, 약탈, 폭동 양상까지 나타나며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번지고 있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주요국들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가 유럽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나온다.

지난주 프랑스 현지에서 시위 사태를 직접 목격한 이 회장은 "지금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는 '충격'"이라며 "프랑스 국민들은 최근 목격한 폭력, 특히 약탈 장면 앞에서 경악하고 슬퍼하며, 무엇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정치적 의미의 폭동이라기보다는 조직화된 세력에 의한 약탈과 폭력 행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러한 불안은 보다 큰 맥락 속에 있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한 이후 프랑스는 내각과 정치의 불안정이 이어지면서 제도적으로 통치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책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프랑스 치안 당국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추가 시위가 예정되어 있는 데다 조직화된 집단 중심으로 폭력 행위까지 발생하고 있다며, 시위와 정치적 불안이 내년 4월 대선 국면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프랑스 대선에 대해서는 현재 시위 상황이 극우 성향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상당수 (프랑스) 국민은 이번 소요가 이민 및 통합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며 "지난 수년간 이 문제를 일관되게 제기해 온 정당은 국민연합뿐"이라고 극우 강세 이유를 설명했다.
 
경제적 불안에 흔들리는 사회…유연한 민주주의 필요


프랑스는 근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자 유럽의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다. 이번 시위를 두고 프랑스식 사회 모델 및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고부담·고복지를 기반으로 하던 프랑스 사회 정책이 경제난 속에 힘을 잃은 데다 이를 틈탄 여론 분열 속에 극단적 해법을 주장하는 극우·극좌 세력의 힘이 커지면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관측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현재 극우 세력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전체가 극단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프랑스인들은) 국가 제도와 민주주의의 올바른 작동을 중시한다"며 "다만 많은 이들이 지쳐 있다. 나라가 깊이 병들어 있으며, 이제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일각에서는 프랑스 사회 모델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지나친 분석이라고 본다"며 "사회 모델은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국민들은 이 모델이 나라와 경제의 현실에 맞게 더 엄격한 기준과 더 많은 관리, 그리고 조정을 거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 회장은 현재 민주주의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질서와 권위 유지의 어려움, 사회 변화 속도와 정치적 행동 속도 차이에 따른 '속도의 불일치',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해 통치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하며, 시민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근본적 문제는 경제···韓 견고한 경제 강점 이어가야
 

프랑스의 사회적 혼란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올해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양국 정상 간 상호 국빈 방문이 이뤄졌고, 양국 간 외교 관계를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등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가운데 프랑스 정세 변화는 우리에게도 주요 관심사이다. 한국 역시 고물가, 청년 실업, 재정 부담, 미·중 경쟁에 따른 압박 등 프랑스와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의 위기 및 대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회장은 양국 상황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한국이 지닌 강점을 되새기고 이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질서와 교육·노동의 가치, 탄탄한 산업 기반과 견고한 경제를 한국의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특히 "시위나 사회 혼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경제는 한 나라의 폐와 같다"며 한국이 경제 내실 강화에 방향을 맞춘 정책을 이어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프랑스와 비슷한 시위가 나타나는 것과 관련해서도 "물가 상승과 구매력 저하로 일상생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경제 문제를 주요 원인으로 진단했다.

이 회장은 내년 프랑스 대선 이후 한국과 외교·경제 협력 관계에 대해서는 정권 교체 여부와 상관없이 밀접한 협력 관계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한국이 우려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며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프랑스 국가의 근간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한국과 관계 역시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급진 성향을 띤 정부가 들어면 보호무역주의 등 강경 기조의 대외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현재 이탈리아와 같이 정권 교체가 있더라도 한국과 관계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집권 전 극우 성향으로 평가받던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집권 후 실용주의적 노선에 힘을 쏟으며 한국과 협력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가리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한국이 현재 유럽 정세 변화를 기회로 삼아 유럽과 협력에 한층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유럽의 변화를 깊이 이해하고 새 집권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 후 유럽 각국의 생태계 속으로 진입해야 한다며 이것이 기업뿐 아니라 국익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유럽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며 "유럽은 중국과 미국 이외의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에 더 큰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파리 태생인 이준 회장은 프랑스 최초의 한국계 변호사이자 주한 외국상공회의소 최초로 회장을 역임한 한국계 인사다. 프랑스와 유럽 문제 관련 권위 있는 전문가로 손꼽힌다. 이인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의 손자이자 프랑스 대학에 처음으로 한국학을 설립한 이옥 교수의 아들인 이 회장은 대를 이어 한·프랑스 교류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23년 유럽 전문 싱크탱크 KEY를 설립해 한국과 유럽 관계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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