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전문가인 저자는 세계 경제가 '신용의 시대'에서 '실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놓였다고 진단한다. 부제 '실물과 기술이 재편하는 21세기 화폐질서'가 보여주듯, "돈은 이제 무엇을 담보로 삼는가"라는 질문 아래 수십 년간 세계 경제를 떠받친 신용의 자리를 실물과 기술이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돈의 힘은 에너지, 광물, 반도체, 전력, 핵심 기술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국가는 빚을 갚고, 중앙은행은 화폐 가치를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찍어낸 돈만 있으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굴러왔다. 저자는 이 오래된 엔진에 균열이 생겼다고 본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돈이 있어도 마스크와 백신을 구하지 못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대(對)러 금융 제재를 통해 세계는 달러보다 천연가스와 곡물 등 실물이 금융자산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AI 고도화를 위해서는 GPU와 HBM, 데이터센터, 전력망, 핵심 광물이라는 물리적 기반이 필수다.
저자는 금과 에너지, 핵심 광물뿐 아니라 전력망과 제조 능력, 이를 통제하는 기술이 새로운 시대의 담보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국가가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과 기술을 얼마나 쥐고 있느냐가 화폐의 가치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예컨대 미국 골드러시 때 금맥을 찾아 헤맨 사람들보다 곡괭이와 삽을 팔고, 작업복을 만들어 팔고(리바이스), 금과 현금을 실어 나르는 서비스(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제공했던 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됐던 점을 짚는다. 금이 흐르는 길목을 장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AI를 두고 벌어지는 빅테크, 강대국 등의 경쟁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중동 등 각국이 새 질서에 대응하는 방식도 다룬다. 일본이나 독일 등의 사례를 통해 새 경쟁에 필요한 실물 기반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도 보여준다. 일본에선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데도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 정부가 비과세 투자 제도 등 각종 정책을 통해 자국민의 예금을 투자로 돌리려 했지만 상당수 자금이 미국 주식 등으로 빠져 나간 데는 엔화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소버린 AI는 최소한 자국의 핵심 산업과 공공 서비스 부문 등 국가의 존립에 필수적인 범위에서만큼은 연산 단가와 GPU 시간-금리와 통화량-을 스스로 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통화주권이 있으면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해 독립적으로 국가 경제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통화주권을 잃으면 국민의 삶을 외풍으로부터 방어해주는 필수 보호막이 사라진다. 소버린 AI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317쪽)
거시경제 전문가인 저자는 "환율은 돈이 어디로 도망치고 어디로 모이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도"라고 말한다. 최근 달러 대비 원화값이 1500원 안팎까지 고꾸라졌다. 저자는 지금의 원화 약세는 1997년 외환위기 때와 성격이 다르다고 진단한다. 당시에는 달러 자체가 부족해 생긴 급성 질환이었다면, 지금은 강달러와 해외 투자 확대, 한미 금리 차, 지정학적 불안, 산업 구조 변화가 겹친 만성 질환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과연 한국을 믿을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왜 굳이 원화를 들고 있어야 할까'가 문제다."(54쪽)
환율을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수출이 늘고 경상수지가 좋아지면 원화 가치가 강해진다는 설명이 통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체를 팔아 번 달러보다 국내 투자자, 연기금, 기업이 해외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내보내는 달러가 더 많을 수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이런 흐름을 부추긴다. 미국이 반도체법 등을 앞세워 현지 생산을 요구하면서 한국 기업의 투자는 미국으로 향한다. 현지에서 벌어들인 달러도 현지에서 재투자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저자가 “자본에는 애국심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한국 경제를 이끌 신성장 동력도 문제다. 반도체를 제외한 자동차, 스마트폰, 철강 등 주력 산업이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원화 약세에는 한국 경제의 성장성에 대한 의구심까지 반영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바탕으로 고환율 시대의 투자 전략과 달러 투자법, 포스트 달러 시대의 가능성, 환율 1500원 시대 등을 짚는다.
"문제는 이 엔진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서브 엔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우리 경제를 함께 지탱했던 자동차나 스마트폰 또는 철강과 같은 주력 품목들이 예전만큼의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시장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이제 냉정하게 묻는다. "반도체 엔진이 꺼지면 한국 경제에 무엇이 남는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원화에 대한 신뢰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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