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연의 B스토리] 'H' 버린 파격의 승부수…제네시스의 '아메리칸 드림'

  • 현대(Hyundai)를 지우고, 역사를 쓰다...현대(現代)식 '모빌리티 럭셔리'의 정점

진정한 럭셔리는 정형화된 경험이 아니다. 지불한 가격보다 얼마나 큰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 경험이 얼마만큼 내 삶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느냐. 그게 진정한 럭셔리다.(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제네시스 GV90 네오룬 외장
제네시스 GV90 네오룬 외장[사진=제네시스]
과거의 럭셔리가 '물질적 희소성'에 근거했다면 현대의 럭셔리는 '시간의 밀도'다. 삶에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누구나 똑같이 흘려보내는 24시간을 좀 더 밀도 있게 채워주는 '몰입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 모빌리티가 제공할 수 있는 궁극의 럭셔리 경험이다. 가성비의 대명사였던 현대자동차그룹이 세계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꾼 전환점에는 '제네시스(GENESIS)'가 있다. 제네시스는 이동의 가치를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과정이 아니라 휴식, 성찰, 즐거움의 밀도를 채워넣는 시간으로 정의한다. 시간의 희소성을 지배해 '진짜' 럭셔리를 제공하겠다는 제네시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양 연구소 밀실에서 시작된 'BH' 프로젝트

2004년 현대차 남양연구소 밀실. 당시 정몽구 (명예)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차=싼 차'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극비로 연구진들을 불러 모아 프리미엄 브랜드 개발을 지시한다. 미국 시장에서 '10년 10만 마일 보증'이라는 파격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2류 취급을 받던 브랜드 탓에 판매망 확장에 제동이 걸린 탓이다. 정 명예회장은 "언제까지 가성비 소리에 만족할 거냐"면서 "독일 3사(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와 계급장을 떼고 맞붙을 수 있는 독자적인 후륜 구동 고급 세단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정 명예회장의 지시로 남양연구소 내에 보안을 극대화한 BH 프로젝트 전담 조직이 꾸려졌다.

당시 현대차는 제대로 된 후륜 구동 세단 플랫폼이 없어 연구원들은 벤츠 E클래스, BMW 5 시리즈를 구입해 나사 하나까지 분해해가며 설계를 익혔다고 한다. 그해 개발에 착수해 2008년 1월 첫 양산까지 5년이 걸렸으며, 2세대 제네시스까지 투입된 연구개발(R&D) 비용만 1조 원에 달한다. 제네시스는 2013년 출시된 2세대 모델이 북미 고속도로 안전보험협회(IIHS) 충돌 테스트에서 전 항목 만점을 받으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받는다. 현대차는 2015년 11월 제네시스 독립 브랜딩을 공식 선언하고, 첫 모델 EQ900을 출시한다.

제네시스는 영어로 기원, 창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첫 장인 창세기를 뜻한다. 기존 현대차의 한계를 뛰어넘어 프리미엄 럭셔리 시장으로 향하겠다는 새로운 도약의 의지를 담았다. 제네시스 엠블럼은 현대(Hyundai)를 상징하는 H로고를 버리고, 날개가 차체를 감싸는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풀어냈다. 자동차가 도로 위를 우아하고 역동적으로 비상하듯 나아가는 승리의 염원을 표현했다. 중앙 방패는 명가의 휘장에서 영감을 받아 세계 최고 럭셔리 브랜드로 나아가겠다는 당당함을 드러낸다.

제네시스는 독립 브랜드 선언 이후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당시) 지시에 따라 글로벌 거장들을 대거 영입하는 파격 행보를 선택했다. 아우디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 람보르기니·벤틀리 출신의 루크 동커볼케 디자이너를 비롯해 BMW 고성능 브랜드 'M' 총괄이었던 알버트 비어만 사장이 합류했다. 특히 비어만 사장은 '지옥의 서킷'이라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 테스트 센터에서 수만 km를 달리며 제네시스의 주행 성능을 극단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한 사양 추가가 아닌 승차감과 핸들링 감각의 근본적인 혁신을 이뤄낸 계기다. 디자인 측면에서 '두 줄(Two Lines)' 램프와 독창적인 '크레스트 그릴'은 독일 3사와 견줘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네시스 GV90 테크브리프 현장 사진
제네시스 GV90 테크브리프 현장에서 취재진들이 GV90의 특장점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사진=제네시스]

◇출범 10년만에 160만대, 3분의 1이 美서 판매

제네시스는 출범 10년 만에 글로벌 누적 판매 160만 대를 돌파하며 글로벌 프리미엄 모빌리티 시장의 '톱티어(Top-tier)' 브랜드로 성공했다.

국내를 제외한 최대 시장은 미국이다. 2016년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한 이후 올해 7월까지 현지에서 총 45만4049대를 판매하며 지난달 처음으로 미국 누적 판매 45만 대를 돌파했다.

특히 지난해는 처음으로 연간 판매 8만 대(8만2331대)를 넘어서며 2021년부터 5년 연속 미국 연간 판매 최다 기록을 경신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역대 상반기 최다 판매 기록(3만9088대)을 새로 쓰는 등 판매 규모를 확대해 오고 있다. 이 외에도 올해 7월 미국에서 6947대를 판매하며 22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현지 판매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제네시스의 가파른 미국 시장 성장에는 △우수한 상품성 △세련된 디자인 △최고의 안전 품질 등을 모두 갖춘 SUV 라인업이 주효했다. 2016년 G80과 G90을 처음 선보인 뒤 2018년 G70, 2020년 GV80, 2021년 GV70, 2022년 GV60, 2023년 GV70 전동화 모델, 2024년 GV80 쿠페 등을 차례로 출시하며 현지 소비자들의 다양한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올해(1~7월) 역대 제네시스 미국 전체 판매에서 SUV 모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61.5%를 기록했다. 특히 GV70(전동화 모델 포함)과 GV80(쿠페 포함)은 각각 역대 미국 판매량 1, 2위를 기록하며 도합 누적 판매(26만8724대) 26만 대를 뛰어넘는 등 현지 판매를 견인하고 있다.

제네시스는 앞으로 미국에서 GV90과 GV60 마그마를 본격 출시하고 하이브리드 모델을 신규 투입하는 등 럭셔리부터 고성능, 플래그십, 전동화, 하이브리드를 모두 아우르는 SUV 풀 라인업을 구축해 성장 흐름을 이어나간다.

특히 최근 출시한 GV90은 제네시스 최초의 초대형 플래그십 전동화 SUV로, 플래그십 전용인 'eMP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됐으며, 압도적인 개방감과 넓은 승하차 공간을 제공하는 독립 개폐형 히든 B필러 코치 도어 '네오룬 아치 게이트'가 특징이다. 제네시스 관계자는 "고객이 차량에 머물며 경험하는 모든 순간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지금까지 브랜드가 쌓아온 럭셔리 철학과 혁신 기술 역량을 모두 집약했다"고 설명했다.

올 하반기부터는 기존 SUV 라인업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신규 투입한다. 미국은 전기차 캐즘(전기차 수요정체)으로 하이브리드 수요가 매년 30~40%씩 폭발 성장하고 있다. 특히 현대차의 올 2분기 하이브리드 판매량은 전년동기대비 70% 이상 증가했다. 제네시스는 미국 SUV 라인업이 투입된 2021년을 기점으로 판매량이 매년 10~20% 폭발하고 있는 만큼 하이브리드 라인업 강화로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현지 반응도 긍정적이다. 미국 유명 경제지 포브스는 "지난 10년간 제네시스는 한국적 감성으로 럭셔리를 새롭게 정의하며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왔다"며 "GV90의 등장으로 전 라인업을 갖춘 제네시스는 마침내 꿈을 현실로 만들 준비를 마쳤다"고 평가했다. 모터트렌드 역시 "신흥 럭셔리 브랜드가 캐딜락, 레인지로버, 심지어 롤스로이스까지 정조준했다"며 "제네시스의 새로운 플래그십인 GV90은 기존 프리미엄 브랜드 사이에서 판도를 흔드는 변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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