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준의 어부바] 전세 종말의 조건

  • 전세 줄이기 전에 세입자 갈 곳부터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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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hatGPT]
부동산시장은 읽기 어렵습니다. 내 집 마련 역시 어렵습니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어’려운 ’부’동산 ’바’로보기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회견에서 전세를 “일종의 사금융”이라고 표현했다. 전세대출이 집값 상승을 부추겼고 전세사기의 토양이 됐다는 진단도 함께 내놨다. 전세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가지 않겠나”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전세가 한국에만 있는 제도라는 통념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볼리비아와 인도, 일부 유럽 국가에도 보증금을 맡기고 집을 쓰는 비슷한 계약이 있다. 다만 전세가 전국적인 임대차 방식으로 자리 잡은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드문 제도라고 해서 곧바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따져야 할 것은 전세가 없어질지 여부가 아니다. 전세에 기대 살던 임차인들이 그다음 어디로 갈 수 있느냐다.
 
전세가 준 안정과 떠넘긴 위험

전세는 많은 사람에게 월세를 아끼는 방법이었다. 무주택 가구는 목돈을 보증금으로 맡기는 대신 매달 나가는 주거비를 줄였다. 공공임대에 들어가기에는 소득이 높고, 집을 사기에는 아직 돈이 모자란 사람들에게 전세는 사실상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였다.

그래서 전세는 오랫동안 주거 사다리로 불렸다. 그러나 전세의 순기능을 주거 사다리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더 현실적인 기능은 거주 안정과 소득 공백을 완충해준 데 있었다. 목돈이라는 문턱은 높았지만, 일단 보증금을 마련한 세입자는 매달 월세를 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시적으로 소득이 끊겨도 당장 월세를 못 내 쫓겨날 위험도 작았다.

하지만 전세는 한 얼굴만 가진 제도가 아니었다. 임차인에게는 주거비 절감 장치였지만, 시장 전체로는 집값 상승을 떠받치는 자금줄이기도 했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무이자로 받아 집을 사거나 다른 곳에 운용할 수 있었다. 집값이 오르면 시세차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세입자에게 전세는 안정장치였지만, 집주인에게는 투자 사다리이기도 했다.

이 구조는 집값 상승을 전제로 한다. 집값이 예전처럼 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면 집주인의 계산은 달라진다. 보증금을 크게 받는 전세보다 매달 돈이 들어오는 월세를 택한다. 최근 전세 물량이 줄고 월세가 늘어나는 흐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세가율은 이 불안정을 보여준다. 전세가율이 높으면 집값과 보증금의 차이가 작아진다. 적은 돈으로 집을 사는 갭투자가 쉬워지는 이유다. 그러나 전세가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집값이 조금만 내려도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진다. 전세사기는 이 구조를 악용한 사건이었다. 집값에 가까운 보증금을 받아놓고 손실 위험은 세입자에게 떠넘겼다.

반대로 전세가율이 낮아지는 흐름에서는 집주인이 전세를 놓을 이유가 줄어든다. 전세 물량 자체가 마른다. 전세가 많을 때는 보증금 위험이 커지고, 전세가 줄어들 때는 임차인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 부담은 세입자에게 간다.

개인에게 전세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집을 사지 않아도 월 주거비를 낮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시장 전체로 반복되면 집값 상승 기대에 기대는 구조가 된다. 그 기대가 흔들리면 비용은 임차인에게 돌아간다.
 
싸거나 비싸거나, 갈 곳이 없다

전세 이후 임차인은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 시장이 내놓는 선택지는 대체로 둘이다. 싸거나, 비싸거나. 그 사이가 비어 있다.

전세가 줄어든 자리를 받아낼 곳은 결국 공공임대와 민간임대다. 공공임대는 임대료가 낮다. 대신 품질과 이미지에서 ‘주거복지’라는 인식을 좀처럼 넘지 못했다. 운영을 맡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부담도 크다. LH의 부채는 2024년 말 160조원대에 이르렀고, 낮은 임대료 구조 탓에 손실 부담도 계속되고 있다. 공공이 전세의 빈자리를 모두 떠안기 어려운 이유다.

공공임대가 충분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전체 물량만 보면 한국이 크게 부족하지 않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오래 살 수 있는 장기임대만 놓고 보면 체감은 달라진다. 통계상 숫자와 실제 시장에서 느끼는 부족함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다. 전세가 줄어드는 속도를 공공임대가 곧바로 따라잡기는 어렵다.

민간임대는 반대 방향의 문제가 있다. 임대차 시장의 상당 부분이 개인 임대인에게 기대고 있다. 규모가 작고 관리도 고르지 않다. 월세 비중은 이미 70%에 육박했다. 보증금을 낀 월세까지 포함하면 전세의 자리는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전세사기의 충격도 아직 시장에 남아 있다.

민간임대가 전세의 대안으로 부족한 이유는 비싼 데 그치지 않는다. 월세와 관리비는 매달 사라지는 비용이고,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가격 불안이 반복된다. 비싼 월세가 곧 좋은 관리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개인 임대 중심의 빌라와 원룸, 오피스텔은 수선과 관리 기준이 들쭉날쭉하다. 세입자는 비용을 내면서도 주거 품질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

월세화의 충격은 자산이 적은 세대에게 먼저 간다. 전세보증금도 마련하기 어렵지만,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는 저축 여력을 곧바로 갉아먹는다.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월세 증가는 단순한 주거비 부담이 아니다. 다음 집으로 옮겨갈 시간을 늦추고, 내 집 마련까지 가는 거리를 더 멀게 만든다. 전세보증금은 위험했지만 돌려받을 원금이라는 기대라도 있었다. 월세는 그 기대마저 줄인다.

결국 임대료가 낮은 집에는 복지의 낙인이 붙고, 오래 살 만한 집은 비싸다. 공공임대 기준은 넘지만 자가를 사기 어려운 중간층은 갈 곳이 애매하다. 전세가 그동안 메워온 빈틈이 바로 이곳이었다. 전세 이후의 첫 질문은 그래서 간단하다. 임차인은 어디에서, 얼마를 내고,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
 
오래 살 수 있는 임대주택

전세 이후를 준비하려면 중산층 임차인이 오래 살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임대료는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계약은 불안하지 않아야 하며, 시간이 지나도 집이 방치되지 않아야 한다. 단순히 공공임대를 더 짓자는 말로는 부족하다. 가난한 사람만 들어가는 집이라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자가소유만으로 주거문제를 풀 수는 없다. 땅값을 낮춘다고 해도 집을 짓는 비용은 남고,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에게 그 목돈은 여전히 크다. 누군가는 먼저 짓고, 먼저 사서, 오래 빌려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역할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맡느냐다.

한국 사회는 주거를 너무 쉽게 둘로 나눈다. 내 집을 사거나, 아니면 월세를 내며 사는 식이다. 전세 이후의 대안은 이 사이를 넓히는 데서 찾아야 한다. 처음부터 집 전체를 사지 않더라도 집값의 일부를 조금씩 쌓아가거나, 공공이 땅값과 이자 부담을 낮춰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주거비를 내면서도 돈을 모을 길이 완전히 끊기지 않고, 무리한 대출로 집값 하락 위험까지 떠안지 않게 하는 구조다.

오스트리아 빈의 사회주택이 눈여겨볼 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민 상당수가 사회주택에 살고, 그 집들이 저소득층만을 위한 주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조합이나 법인이 공공의 땅과 낮은 금리의 자금을 받아 집을 짓고 운영한다. 대신 수익은 일정 선에서 묶는다. 남는 돈은 다시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짓는 데 쓴다. 입주 기준도 넓어 중산층까지 들어간다. 그래서 그곳에 산다는 사실이 흠이 되지 않는다.

덴마크도 비슷하다. 임대료 일부와 주택에서 생기는 여유 재원을 모아 낡은 집을 고치고 새 집을 짓는다. 중요한 것은 임대주택을 한 번 짓고 끝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대료와 관리, 수선, 재투자가 하나의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이런 사례를 그대로 베끼자는 얘기는 아니다. 핵심은 임대주택을 두 종류로만 나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렴하지만 낙인이 붙은 집, 아니면 비싼 월세 상품. 이 둘 사이에 중산층이 오래 살 수 있는 집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일부 소유와 장기 임대가 결합된 선택지까지 더해지면 임차인은 ‘집을 못 사면 월세’라는 단순한 선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에도 사회주택, 공공지원 민간임대, 청년안심주택 같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았고, 형태도 다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영하는 쪽이 버티기 어려웠다. 임대료는 낮춰야 하고, 집은 오래 관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감당할 구조가 약했다.

공공이 모두 떠안을 수도 없고, 민간에만 맡길 수도 없다. 공공은 땅과 금융을 받쳐주고, 운영은 민간이나 비영리 주체가 맡되 수익은 일정 선에서 묶고 운영이 지속될 정도의 여지는 남기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름이 무엇이든 핵심은 단순하다. 임대료는 무리 없어야 하고, 계약은 오래 유지돼야 하며, 수선과 관리는 방치되지 않아야 한다. 세입자가 감당하고 운영자가 버티는 선에서 집이 오래가도록 만드는 구조여야 한다.
 
전세를 줄이려면 순서가 있어야 한다

전세를 줄이는 정책은 시장에 빠르게 닿는다. 전세대출을 조이고 보증을 줄이면 집주인의 계산은 곧바로 월세로 기운다. 관건은 그다음이다. 전세가 줄어드는 속도만큼 임차인이 옮겨갈 집은 빨리 생기지 않는다.

집을 짓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제도를 만들고, 사업자를 모으고, 땅을 확보하고, 착공해 입주까지 가려면 몇 년이 필요하다. 반면 대출 규제와 세제 변화는 곧바로 시장을 움직인다. 방향이 맞더라도 순서가 틀리면 피해는 세입자가 본다. 전세를 줄이겠다면 그보다 먼저 사람들이 옮겨갈 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 사이 금융도 임차인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 한국 주택시장은 오랫동안 장기 저리 자금보다 선분양과 전세보증금에 기대 집을 공급해왔다. 전세를 줄이려면 그 돈의 빈자리를 대신할 금융도 필요하다. 그래야 전세보증금 의존도를 낮추는 일이 곧바로 임차인의 월세 부담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금융은 집주인의 수익을 보전하기보다 세입자의 보증금 위험과 월세 부담을 줄이는 데 맞춰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세입자는 더 높은 월세를 감당해야 하고, 보증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도 불안을 겪을 수 있다. 새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려는 수요와 기존 계약을 갱신하거나 이사해야 하는 세입자는 구분해야 한다. 투기 수요를 막는 장치와 실거주자의 이동 비용을 줄이는 장치는 같을 수 없다.

월세 사회의 위험도 가격에 그치지 않는다. 전세에서는 목돈 보증금이 임대인의 불안을 줄였지만, 월세에서는 임차인의 소득과 직업 안정성이 더 엄격하게 평가될 수 있다. 청년, 비정규직, 프리랜서, 1인 가구는 더 불리해질 수 있다. 월세 미납에 따른 강제퇴거, 소득·직업·가구 형태를 이유로 한 과도한 배제까지 새로 다뤄야 할 과제가 된다.

임대 기능도 다시 봐야 한다. 다주택자를 방치하자는 뜻은 아니다. 임대소득에는 과세하고, 보증금을 이용한 무리한 갭투자는 줄여야 한다. 다만 다주택자를 줄이는 일과 임차인이 살 집을 줄이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정책의 기준은 집주인이 몇 채를 가졌느냐만이 아니라, 세입자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느냐가 돼야 한다.

전세 이후의 집은 임차인이 감당할 수 있고, 오래 살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방치되지 않는 집이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주거비를 내는 동안 자산 형성의 길도 완전히 끊기지 않아야 한다. 공공임대 기준은 넘지만 집을 사지는 못한 중간층이야말로 그동안 전세에 기대온 계층이다. 이들이 전세 말고도 감당 가능한 선택지를 갖도록, 전세 축소 속도에 맞춰 집을 공급해야 한다.

전세에 과도하게 기대온 임대차 구조를 줄이려는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 관건은 순서다. 모든 사람이 집을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대료가 무리 없는 수준이고 오래 살 수 있다면 임대로 사는 방식도 정상이다. 소유와 임대 사이에 선택지가 넓어지면 더 많은 사람이 무리한 대출과 불안한 월세 사이에서 덜 흔들릴 수 있다. 전세가 줄어드는 흐름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작 위험한 것은 대체 수단을 마련하지 않은 채 기존 구조부터 해체하는 일이다. 그럴 경우 남는 것은 제도의 정상화가 아니라 부담의 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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