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모자무싸'의 황동만, 24년 전의 고복수와 만나다

얼마 전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가 종영했다. 오랜만에 거의 실시간으로 정주행한 드라마다.
 
주인공 황동만(구교환)과 변은아(고윤정)의 범상치 않은 관계를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는데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이 드라마에서 나온 거의 대부분의 ‘대사’다. “내 인생이 왜 니 맘에 들어야 되는데요”나 “저는 얌전한 아이예요. 만만하고 약한 애가 아니라” 같은 것들 말이다.
 
회차가 지나가는 게 애석할 정도로 아껴봤던 드라마가 끝나고 그 여운을 곱씹다 보니 숨겨왔던 인생드, 24년 전의 한 드라마와 함께 그 속에 살았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고복수. 불치병을 이기고 잘 살고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던 고복수는 황동만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 사진MBC옛날드라마 유튜브 영상 캡처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 [사진='MBC옛날드라마' 유튜브 영상 캡처]
 
고복수(양동근)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4강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았던 그해 여름에 슬그머니 찾아왔던 드라마다. 당시 이 드라마에 출연한 양동근, 이나영은 소위 톱스타는 아니었으므로 경쟁작에 밀려 시청률은 시원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네 멋대로 해라’는 그 후 2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필자의 인생드로 굳건히 존재했고, 그것을 뛰어넘은 드라마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흘렀다. 이 드라는 그저 아주 가끔 머릿속으로 스치듯 잠깐 동안 추억되고, 곧바로 휘발되곤 했다.
 
다 잊고 있었다 생각했던 내 어린 시절 인생드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 ‘모자무싸’와 짝꿍처럼 소환됐다. 고복수와 황동만은 뭐가 다르고 뭐가 같았나.
 

“뭐 어차피 아직도 나는 세상의 떨거집니다” 

 
고복수는 스물여섯의 소매치기 전과 2범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간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드라마 설정상 가장 큰 이유는 원만치 않았던 가정사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제 막 두 번째 징역살이를 끝내고 사회로 복귀한 고복수는 뇌종양 선고를 받는다.
 
이제는 ‘손 씻고’ 스턴트맨으로 몸을 쓰며 제대로 살기로 막 결심한 고복수에게 찾아온 불치병.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너무 약한 사람이라서 아들을 먼저 보낼 수 없어 서둘러 세상을 더 먼저 떠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세상의 떨거지’인 것만 같았던 고복수에게 전경이 나타나 “좋아해도 되냐”고 묻는다. 어느 날 언제고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홀로 버려진 고복수를 특별하게 봐주는 전경이 있다.
 
고복수는 구태의연하고 고루한 기성의 세계에서 거의 타의에 의해 열외로 밀려난 사람이다. 정상적(?)인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무가치한 존재다. ‘네 멋대로 해라’는 부모조차 자신을 돌봐줄 여력이 없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내고야 마는 고복수의 찬란한 여정을 담았다.
 
굳이 ‘찬란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고복수와 전경과 주변의 몇몇 인물들이 그려내는 드라마 속 여정에는 ‘낭만’이 있고 ‘순수’가 있어서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와 전경 사진MBC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와 전경. [사진=MBC 공식 홈페이지]

전경이라는 이 20대 초중반의 음악가는 자기를 좋아하는 부잣집 자제에다 번듯한 직업이 있는 남자에게 “나 남자랑 자봤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다(24년 전에는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폭력적이고 돈만 아는 아버지 밑에서 돈 안되는 음악을 하고 있어 매일 구박받는 전경이지만 그 자신 역시 부잣집 자제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더 순수한 걸까. 전경은 낭만적으로 고복수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자신을 특별하게 치켜세우는 전경의 응원을 받고 고복수는 원래 오랜 연인이었던 미래(공효진)와도 쿨하게 이별하고 전경과 순수한 사랑을 한다. 그렇게 고복수는 자신과 전경과 그 주변 인물들과 이 드라마를 보는 젊은 시청자들의 인생을 가치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덩달아 반짝거리는 내 인생의 가치를 안 것 같은 기분(혹은 착각)을 갖게 된 ‘네멋폐인’은 그래서 고복수와 전경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 그토록 많은 쪽지를 붙여놨을 것이다.
 

“내가 무직이라는 말에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는 줄 몰랐다”

 
황동만은 40대 영화감독 지망생이다. 그는 20년 넘게 지망생인 신분으로 살았다. 그래도 시나리오 쓰는 법 강의도 하고 각종 알바도 섭렵했으니 백수는 아닌데도 자신의 직업을 말해야 할 때 ‘무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데 아직 되지 못했으므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황동만 사진JTBC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황동만. [사진=JTBC 공식 홈페이지]
 
2026년의 황동만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된 상태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가치해진 자신과 싸우며 어떻게든 존재의 불안함을 위악으로서 감추는 사람이다.
 
이 쉴 새 없는 위악에 주변인들은 질색팔색을 하는데 변은아만은 그 위악에서 순간 순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황동만의 ‘파워’를 발견한다. 변은아는 황동만을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인간이래. 근데 인간적이지 않아. 이게 최고 무능 아닌가?”라고 쏘아붙이며 비난을 가하는 사람의 비인간성을 비난한다.
 
감독 데뷔를 눈앞에 뒀건만 “줄반장도 못한 놈이 어떻게 200명을 이끌어가”라고 무섭다고 고백하는 황동만에게 변은아는 “도망가고 싶다면 내가 도망가게 해줄 거예요”라고 한다. 두려움을 견디지 말라고, 두려움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변은아만의 통찰이 담긴 위로를 한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변은아 사진JTBC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변은아. [사진=JTBC 공식 홈페이지]
 
전경은 고복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면 변은아는 황동만이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감싸는 편에 가깝다. 변은아가 황동만을 감쌌던 이유는 그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 황동만만큼 자신의 무가치함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복수와 황동만이 만났을 때
 
고복수와 황동만은 24년이라는 적잖은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당대의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나름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다.
 
고복수는 20대였고 황동만은 40대라는 차이와 함께, 훨씬 어렸던 고복수는 앞으로 잘 살 거라는 낭만과 이상이 있었다면 황동만의 앞에는 감독으로서의 성공과 더불어 다소 현실적인 고난과 역경이 있다.
 
두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됐던 이유가 다르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응원 받는 방식도 다르지만 두 주인공에게는 비슷한 결의 치열함이 있다.
 
‘무가치함’을 잘 숨기고 위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복수와 황동만의 인생은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가 시청률과 화제성에 상관없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그 감정은 아마도, 특별할 것 없는 삶일지라도 매순간 그 고단한 삶에 생동감 있게 반응하며 살아내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서 오는 ‘경외’일 것이라 생각된다.
 
두 드라마는 생동하는 삶 그 자체를 시청자에게 느낄 수 있게 해줬던 것 같다. 그래서 동떨어져 보인 두 드라마가 하나로 연결됐고 고복수와 전경, 황동만과 변은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선한 사람들이 세월과 상관없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고 세월을 건너 마침내 만나 또 다시 이를 보는 누군가의 삶을 살아나게 한다.


* 자투리 리뷰 :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주요한 감상을 빼고 난 후 남겨진 또다른 감상의 자투리를 리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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